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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러 ‘21세기 함포외교’…한·미·일 중심 동북아 질서 흔든다

중앙일보 2019.07.25 00:12 종합 3면 지면보기
중국과 러시아가 23일 자국 전략폭격기를 투입,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무단 진입했다. 러시아는 A-50 정찰기로 한국의 독도 영공까지 침입했다. 이를 두고 러시아가 중국과 손잡고 특유의 ‘함포외교(Gunboat Diplomacy)’ 21세기 버전을 시작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은 세력 확장을 위해 당시로선 전략자산인 군함으로 항로를 뚫는 이른바 ‘함포외교’를 펼쳤다. 냉전 시기엔 전략폭격기를 통해 무력 시위를 하면서 서방권의 준비태세를 떠보고, 유사시 항로도 점검했다.
 

대륙세력 폭격기 동원 동해 훈련
“해양세력 약한 고리 한국 노려”
독도 상공 침범 한·일 갈등 유도
BBC “중·러가 미국에 악몽 선물”

러시아 국방부는 23일 이번 도발과 관련, “러시아 공군과 중국 인민해방군 공군이 장거리 군용기를 이용해 아시아·태평양 해역에서 첫 번째 연합 공중 초계비행을 수행했다”고 밝혔다. 중·러 두 나라가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맞서 동해 제해권 및 동북아에서의 주도권 확보라는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 언급이란 해석이 나온다.
  
19세기엔 군함으로 길 뚫고 세력 확장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중·러의 대륙 세력이 인도·태평양으로 나가는 데 걸림돌인 미·일 해양 세력을 돌파하려 한다는 지정학적 셈법이 숨어 있다. 인도·태평양으로 가는 경로가 동해”라며 “해양 세력의 가장 약한 고리인 한국을 집중적으로 노린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지난 23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무단으로 침입한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들. 사진은 러시아 TU-95 폭격기. [사진 일본 방위성]

지난 23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무단으로 침입한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들. 사진은 러시아 TU-95 폭격기. [사진 일본 방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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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CNN뉴스도 “중·러가 (이번 사태로) 준 메시시는 명확하다”며 “태평양 지역에서 싹 트고 있는 그들의 군사동맹을 시험할 준비가 됐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CNN은 한국과 일본이 러시아 군용기의 영공 침범을 두고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의견 대립이 있었음을 강조하며 “중국과 러시아는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관계가 아니지만, 일본 등 NATO 국가와 방위조약을 맺고 있는 미국보다 동북아 지역에서 더욱 공고한 군사적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가 독도 상공을 영공 침범의 목표로 선택하면서 사실상 한·일 간 갈등을 유도해 ‘적전 분열’ 양상을 유도한 셈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동해와 독도를 건드린 것은 “중·러 양국에서 군 레벨이 아니라 그 윗선에서 고도로 전략적 계산을 마친 뒤 시기를 맞춰 벌인 전략적 도발”(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책임연구위원)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23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무단으로 침입한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들. 사진은 A-50 공중조기경보통제기. [사진 일본 방위성]

지난 23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무단으로 침입한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들. 사진은 A-50 공중조기경보통제기. [사진 일본 방위성]

영국의 공영방송 BBC의 군사전문기자 조너선 마커스는 23일 “미국에 악몽을 준 (중·러) 동맹”이라고 이번 사태를 분석하며, 중국이 러시아와의 군사적 공고함을 한·미·일에 과시하고, 무역갈등을 빚고 있는 미국에 긴장감을 던졌다고 했다. 실제 중·러 두 나라는 지난해 9월 사상 최대 규모 군사훈련인 ‘보스토크 2018’을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 기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실시했다. 30만 명의 병력과 3만6000대의 군용차량, 1000대의 군용기가 동원됐다. 소련 붕괴 후 가장 큰 규모의 군사 훈련으로 평가됐다.
  
올해 KADIZ 침범 중국 25번 러 13번
 
지난 23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무단으로 침입한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들. 사진은 중국 H-6 폭격기. [사진 일본 방위성]

지난 23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무단으로 침입한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들. 사진은 중국 H-6 폭격기. [사진 일본 방위성]

중국이 베트남과 분쟁 중인 난사군도처럼 단계적으로 동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수순에 들어갔다는 시각도 있다. 브루스 베넷 랜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23일(현지시간) 중앙일보에 “중·러의 도발은 인공섬을 만들고 결국 군사기지화한 스플래틀리(Spratly Islands·난사군도)처럼 러시아와 함께 서서히 동해는 물론 동북아 패권을 확보하겠다는 중국의 장기 전략 차원에서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1980년대 중반 중국이 난사군도 관측시설을 짓겠다고 처음 진입한 뒤 산호초에 3개 인공섬 짓고 군사기지화하며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단계적 수순에 들어간 것이라는 의미다.
 
그는 “올해 중국이 25번, 러시아가 13번 KADIZ를 침범한 것만 봐도 이번 일이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다”며 “앞으로 중국 어부들의 한국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에 대한 자유로운 조업 허용을 원할 수도 있고, 남중국해처럼 하나의 군사시설을 지으려 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그러면서 “결국 한국이 이번처럼 영공과 KADIZ를 수호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며 “러시아 A-50처럼 중·러 방공식별구역에 글로벌호크를 투입해 대응할 수도 있다”고 조언했다. 러시아와 중국이 냉전 때 소련에 대항하는 차원에서 미국 주도로 그려진 KADIZ와 일본방공식별구역(JADIZ)을 무력화하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켄 고스 미 해군분석센터(CAN)의 애널리스트는 “이 사건은 러시아와 중국이 동북아에서 자신들의 군사력을 확실히 보여주고, 한국과 일본 자산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한 신호”라며 “또 한·일 양국과 미국 사이를 이간하고 동맹 간 불화도 확산시키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패트릭 크로닌 허드슨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러·중 두 나라는 동북아 질서를 무너뜨리려 통일된 전선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크로닌은 “미국의 중·러 제재와 한국의 대북 집중, 한·일 긴장을 고려할 때 두 나라는 오랜 규칙을 개정하려고 모색하는 것”이라며 “동북아 법치와 규범을 보존하려면 한·미·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 합심해 격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워싱턴=정효식 특파원, 서울=이철재·김다영 기자 kim.da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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