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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의 퍼스펙티브] 아베-한반도의 악연과 트럼프의 울퉁불퉁한 세계

중앙일보 2019.07.25 00:03 종합 26면 지면보기
일본이 수출 보복의 강수를 두는 까닭은
아베 집안과 한반도의 악연은 뿌리 깊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는 A급 전범이었고, 고 조부인 오시마 요시마사는 1894년 고종을 겁박한 장본인이다. 사진은 지상파 드라마 ‘녹두꽃’에서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침입하는 장면이다. [사진 SBS 캡처]

아베 집안과 한반도의 악연은 뿌리 깊다.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는 A급 전범이었고, 고 조부인 오시마 요시마사는 1894년 고종을 겁박한 장본인이다. 사진은 지상파 드라마 ‘녹두꽃’에서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단 침입하는 장면이다. [사진 SBS 캡처]

얼마 전 종영된 지상파 드라마 ‘녹두꽃’의 한 장면이다.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핑계 삼아 1894년 경복궁에 무단 침입해 고종을 겁박한 일본군 혼성여단의 오시마 요시마사 소장. 정한론을 주창한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 그는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이듬해 뤼순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만주지역을 관할한 관동 총독이기도 했다. 그가 바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고조부다.
 

아베 집안과 한반도에 얽힌 악연
다자간 → 양자협상 된 통상 환경
WTO의 실효적 조치도 기대 난망
국익 따져 양자 외교로 해결해야

패전 이후 일본의 보수 세력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평화헌법을 받아들이고 경제성장에 집중한 요시다 시게루 총리 계열이다. 이 온건 보수는 미국의 세계 패권을 인정하며 비교적 과거사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다른 한쪽은 기시 노부스케 총리 계열이다. 기시는 A급 전범이었으나 극적으로 사면된 이후 자민당 산파 역할을 했다. 정한론의 근거지였던 야마구치 현 출신으로 제국 일본의 향수를 잊지 않으며 끊임없이 아시아에서의 지위 회복을 노린다. 그의 외손자가 아베 총리다.
 
당시 여단장이던 오시마. [중앙포토]

당시 여단장이던 오시마. [중앙포토]

이런 환경에 둘러싸인 아베에겐 한반도와 개헌이  DNA에 깊이 새겨져 있는지 모른다. 그의 이면을 파헤친 책 『아베 신조, 침묵의 가면』에 따르면 1993년 부친 아베 신타로 외상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처음 당선된 때의 국회 등원 소감부터 남달랐다. 다른 초선의원들은 대개 “아직 미숙하니 선배의원들의 가르침을 따라 하루빨리 제구실을 다 하겠다”고 하는 반면 아베는 “헌법 개정을 하기 위해 의원이 됐다. 한시라도 빨리 미국에 의해 강요된 헌법이 아닌 일본의 자주헌법을 제정하고 싶다”고 했다.
 
한반도는 아베의 정치적 도약에 디딤돌이었다. 그는 부친의 측근이자 아베 파벌이던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2001년 총리가 되면서 관방 부장관에 발탁됐다. 이듬해 전격적으로 평양에서 북·일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고이즈미를 따라 들어가 일본인 납치 문제를 내세워 대북 강경책을 주도했다. 그 덕분에 대중적 인기와 함께 ‘납치의 아베’라는 닉 네임을 얻으면서 화려하게 자민당 간사장에 올랐다. 그리고 2006년 고이즈미의 후계자로 52세에 총리 자리를 거머쥐었다.
 
한·일 전문가들 사이에 이번 강제 징용 문제가 오래 지속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베가 개헌의 야심을 위해 한·일 갈등을 이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내년 7월 도쿄올림픽 전후로 협상 국면에 들어간다 해도 그 이후에 언제든 재발할 소지가 다분하다. 더구나 아베와 문재인 대통령은 성향이 정반대다. 『예정된 전쟁』을 쓴 그레이엄 앨리슨 하버드대 석좌교수는 “투키디데스의 함정의 중요한 동력은 ‘계산 착오’이며 국가끼리 자신의 능력은 과대평가하고 상대방을 과소평가하면서 비극이 생긴다”고 지적했다. 일본은 여전히 한국을 한 수 아래로 보고 있고, 문재인 정부는 한일군사정보협정(지소미아) 파기 검토까지 감행할 움직임을 보였다. 위험한 도박이다.
 
아베가 거침없이 무역 보복을 휘두르는 배경에는 크게 달라진 국제 통상환경도 한몫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공격적 일방주의’와 양자 협상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변한 것이다. 지금은 1985년 미·일 반도체 분쟁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당시 로스앤젤레스올림픽 특수를 타고 잠시 반짝하던 반도체 경기가 급락하기 시작했다. 인텔·AMD 등이 D램에서 손을 떼고 철수하고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모토로라 등은 대규모 해고와 감산에 들어갔다. 일본 업체들의 덤핑으로 치킨 게임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에다 미국은 막대한 대일 무역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이른바 ‘전략적 무역정책’을 들고나온 대표적 인물이 로라 타이슨 버클리대 교수다. 그녀는 『누가 누구를 때리는가?』에서 일본의 불공정 무역에 맞서 전략적 무역정책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GATT(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 체제는 관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본의 교묘한 보조금·덤핑·지적재산권 침해 같은 비관세 장벽에 맞설 수 없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미 정부가 다자간 협정 대신 미·일 양자 간 협상에 나서라고 주문했다.
 
여기에 호응해 레이건 행정부는 통상법 301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우선 무역적자 해소를 위해 85년 9월 22일 일본의 팔을 비틀어 엔화 강세를 유도하는 플라자 합의를 성사시켰다. 그 이튿날, 레이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자유무역(free trade)은 말 그대로 공정무역(fair trade)이 돼야 한다. 시장이 닫혀 있다면(closed) 자유무역이 아니다. 정부가 보조금(subsidies)을 줘도 자유무역이 아니다. 다른 나라 정부가 우리 상품을 베끼도록 놔둔다면(copying) 이는 우리의 미래를 뺏는 것이다. 우리의 기업이 실패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지 않겠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이후 86년 미·일 반도체 협정이 체결됐다. “향후 5년 내 일본 시장에서 외국산 반도체 점유율 20% 기록 보장한다”는 게 핵심이었다. 당시 세계 반도체 순위는 일본의 NEC-도시바-히타치가 상위 1~3위를 휩쓸었지만 93년에는 인텔-NEC-모토로라 순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왼쪽 아래 표 참조> 하지만 이런 판도 변화는 반도체 협정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용 컴퓨터 확산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와 인텔의 CPU(중앙처리장치)가 새로운 IT 시장의 패권을 거머쥔 영향이 더 컸다.
 
트럼프 등장 이후 평평했던 세계는 다시 울퉁불퉁해지고 있다. GATT와 세계무역기구(WTO) 같은 다자주의 무역시스템이나 NAFTA(북미자유무역협정)·TPP(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같은 지역협정을 활용해온 클린턴·오바마 행정부와 달리 다시 80년대처럼 1:1 양자협정으로 돌아간 것이다. 트럼프는 중국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자유무역을 희망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은 상대 국가들이 경제와 정치 개혁을 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유무역을 말하지만, 오직 자신들에게 득이 되는 규칙과 협정만 지킬 뿐이다. 우리도 이제 국가 전략에서 미국을 최우선(America First)으로 둘 것이다.” 30여년 전 레이건 연설과 닮은꼴이다.
 
아베는 이런 변화를 틈타 한국을 괴롭히고 있다. 문제는 양자 간 협상에선 자국의 무역 이익 침해 여부나 국가 안보에 대한 위협 여부를 해당 국가가 스스로 판단해 불공정 무역이라며 제재하는 시스템이란 것이다. 오로지 힘이 지배할 뿐 다자간 협정은 껍데기만 남게 된다. 당연히 세계 언론들도 일본을 비난한다. “아베의 수출 규제는 트럼프 따라 하기이며 글로벌 무역 규칙에 도전”(뉴욕타임스) “아베 신조의 가망 없는 무역전쟁”(블룸버그 통신) “일본의 근시안적 규제이자 자해 행위”(이코노미스트) “자유무역 혜택을 누려온 일본의 위선”(파이낸셜타임스) “일본의 외교가 트럼프화 되고 있다”(월스트리트저널)….
 
그러나 이번 갈등을 WTO 일반이사회에서 논의하거나 WTO에 제소한다고 해도 실효성 있는 조치를 끌어내기 쉽지 않다. 미국에 중재를 요청해도 이미 일방적 무역주의로 기운 트럼프 행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줄지 의문이다. 미국의 포린 폴리시는 “트럼프가 중재에 나서는 대가로 미군 주둔 비용이나 무역협정에서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부동산 사업가 출신답다.
 
우리 정부가 이번 마찰을 풀려면 한반도 문제를 정치화시켜 오래 끌고 가려는 아베, 그리고 트럼프가 바꿔놓은 국제 무역질서를 감안해야 한다. 이념이나 민족 감정을 내려놓고 철저히 국익을 따져 차분히 대응해야 할 것이다. 죽창이나 의병, 12척의 배가 아니라 치밀한 지혜와 전략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나마 어제 청와대의 페이스북 내용이 다행이다. 시도지사 회의를 마친 뒤 오찬 자리에서 문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한 것이다. “지난번 전남경제투어에서 거북선 12척 말씀을 기억하신 대통령께서 마이크를 잡으시더니 한 말씀 하신다. ‘오해가 없길 바란다. 지난번 전남 가서 거북선 12척 얘기를 했더니 다들 너무 비장하게 받아들였더라. 일본의 경제보복 문제는 당당하게 대응하고 특히 외교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렇게 되리라 본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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