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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라종일 전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의 直說

중앙일보 2019.07.24 10:11
■ 자국 기업 견제하는 문 정부에 미·일 기업들 깜짝 놀라
■ 한국에 사과하던 일본, 한국에 추궁하는 등 관계 역전 시도

커버 스토리 | 특별 인터뷰
“상유12척? 국정 담당자가 즐겨 쓰면 곤란”

■ 일본 경제도 과거 한국 덕 봐… 북한 간첩선, 특수 부대 첨단 장비는 일제


라종일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한·일 관계가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정부의 대비가 어땠는지를 자성할 때라고 말했다.

라종일 전 국가안보보좌관은 한·일 관계가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 정부의 대비가 어땠는지를 자성할 때라고 말했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는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정보원 해외·북한 담당 1차장,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냈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도 문재인 후보의 외교자문단인 ‘국민 아그레망’의 중심으로 활동했다. 공직 활동 반경을 놓고 보면 진보 진영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문재인 대통령과는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같이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또 2004년부터 3년 정도 주 일본 한국대사를 지냈다. 그만큼 일본과 한국의 민감한 현안의 작동 방식에도 밝다고 하겠다. 한·일 관계가 더 할 수 없이 험악한 지경으로 치닫는 요즘 월간중앙이 라 교수와 인터뷰를 한 배경이기도 하다.
 
라 교수는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평범한 진실의 한 단면을 일깨웠다. 예컨대 한국 정부가 삼성 등 국내 대기업을 옥죄고 나설 때 해외의 경쟁 기업들은 표정관리하면서 예의 주시했다고 전했다. 또 일본 정부의 한국을 향한 공세의 이면에 놓인 그들의 심리적, 외교적 노림수를 직시해야 한다고 했다. 나아가 우리 정부와 국민도 공격의 빌미를 준 게 없는지 그 근원을 성찰하자고도 했다. 그는 지금과 같은 치킨게임 양상을 완화할 수 있는 몇 가지 아이디어도 함께 내놓았다. 라 교수와의 인터뷰는 7월 13일 서울 장충동 서울클럽에서 오찬을 겸해 2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일본, 한국에 대한 정신적 부채 털어내려 해”
2018년 8월 18일 일본 조간신문들은 일제히 ’일본에 의한 징용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이 존재한다“는 문재인 대통령 발언을 보도했다. / 사진:연합뉴스

2018년 8월 18일 일본 조간신문들은 일제히 ’일본에 의한 징용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이 존재한다“는 문재인 대통령 발언을 보도했다. / 사진:연합뉴스

이번 사태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
 
“다각도의 접근법이 필요하다. 먼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국제관계에서 ‘통상(通商)’이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통상 문제를 정치적으로 가장 먼저 활용한 나라는 중국이다. 중국은 일본과의 분쟁에 희토류 금수 조치를 취했고,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가지고 한국에 경제보복을 가했다. 이건 완전히 경제하고 별개의 문제였다. 이 문제야말로 세계무역기구(WTO)에 갈 사안인데 말이다. 그 다음의 사례가 현재 논란의 중심에 있는 미·중 무역전쟁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중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통상 문제를 이용했고, 그 뒤를 이어 일본이 한국에 수출 규제 조치를 부과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의 밀약에 의한 결과라는 시각도 있다.
 
“국제관계 속 세력균형 문제를 봐야한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삼각동맹을 잘 유지하는 것을 이 지역의 안전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한국이 유독 북한에 대해서는 유화적이고 일본에 대해서는 심하게 각을 세운다는 인식이 많다. 미·일에는 문재인 정부가 지역 균형에 있어서 세력 판도를 새롭게 짜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지금은 첨단기술이 국력을 과시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렇다. 국가 간 외교 수단으로 첨단 과학기술이 관건이 된다. 미·중 관계에서도 그렇고 이번에 일본이 한국에 대한 공세를 시작하면서 첨단기술을 앞세우고 있지 않은가. 국력이란 게 군사력도 있고, 외교력, 경제력, 인구 등 여러 요소로 구성되지만 최근의 예를 보면 첨단기술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 미·중 갈등에서 5G 기술이 두드러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라종일 교수는 “일본의 지인에게서 들었다”며 미국의 인텔이 한국의 삼성을 보는 관점을 소개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삼성 등 IT기술 기업이 잘 되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국내의 대기업들을 견제하는 걸 보면서 일본인 지인이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말을 하더라. 인텔은 삼성을 경쟁상대로 보고 있는데 한국 정부는 삼성을 견제한다는 것이다. 이 친구 말은 ‘정부가 삼성을 국제상황 속에서 보지 않고 국내문제로만 본다’는 것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재벌 개혁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재벌 개혁은 역대 정권의 중요한 문제이며 아무리 대기업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명백한 불법적인 혹은 부정의한 처사에 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어떻게 하면 국제적인 경쟁의 와중에서 국익을 해하지 아니하고 올바른 조치를 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난제로 등장할 것이다.”
 
일본은 뭔가를 단단히 작심하고 저렇게 나오는 걸까?
 
“지금까지 일본은 우리에게 정신적 부채가 있는 나라였다. 전범국가인 일본은 그동안 한국에 사과와 배상을 요구받아 왔다. 그런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일본이 한국과의 관계 역전을 꾀하고 있는 것 같다. 이제까지는 일본이 우리에게 부채를 지고 사과하고 배상하는 관계였는데 이제 한국이 사과하고 책임을 추궁당하는 그런 상황으로 역전시키려 하는 게 아닌지, 여러 가지 힘든 면이 있다. 이는 한·일 관계의 새로운 동태이다. 일본은 우리에게 비난과 함께 공세적으로 책임을 묻고 있다.”
 
최근 일본의 수출 통제 조치와 관련해 도쿄에서 열린 양국 과장급 실무회의를 봐도 우리 대표단을 의도적으로 홀대하는 듯한 장면이 연출됐다.
 
“정부 간 약속을 쉽게 뒤엎고 북한과 친하게 지내려는 한국은 믿을 수 없는 나라라며 책임을 지우는 그런 모습이다. 양국 관계에 새로운 양상의 출현을 예고한다. 우리는 감정적인 대처 이상의 높은 차원의 대응을 생각해봐야 한다.”
 
이번 사태가 장기적으로 복잡하게 꼬인다면 어떤 조건이 작용하는 걸까?
 
“우리나라에는 반미주의자들도, 친미주의자들도 있다. 북한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일본은 항상 남북한 ‘공동의 적’이다. 친일이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철저히 금기시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만약 일본하고 북한 중 살 곳으로 한 나라를 택해야 한다면 어느 나라를 택하겠냐’고 물으면 거의 모든 이들이 일본을 택한다. 북한에 살면 매일 위대한 수령 칭찬을 해야 한다. 침묵할 자유도 없는 곳이 북한일 것이다.”
 
일본의 의심, “한국은 북한 편인가?”
레이와 시대를 연 나루히토 천황과 마사코 황후. 일본 황실은 한국에 대해 친밀감을 표시해왔다. / 사진:연합뉴스

레이와 시대를 연 나루히토 천황과 마사코 황후. 일본 황실은 한국에 대해 친밀감을 표시해왔다. / 사진:연합뉴스

그래서 일본으로선 납득하기 어렵겠다.
 
“북한과 달리 일본은 언론의 자유도 보장되고, 사법부도 증거 없이 처벌할 수 없다. 수상을 비난하거나 비판해도 괜찮다. 한국이 아무리 일본을 나쁘다고 한들 중국이나 북한보다는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한국은 중국과 북한에는 비교적 반감이 적은데, 유독 일본에 대해서는 반감이 많은지 궁금해 한다.”
 
그 원인은 뭘까?
 
“과거를 깨끗하게 청산하지 않는 일본의 잘못도 크다. 일본 국민들은 국교정상화 이후에 한국이 지금처럼 잘살게 된 것은 일본의 도움이 컸다고 주장한다. 일정 부분 맞다고 생각한다. 국교정상화 이후부터 일본은 한국에 현금 보상도 하고 투자도 했다. 그런데 사실 일본도 한국으로 인해 굉장한 덕을 봤다. 1965년 때부터 지금까지 한·일 무역 적자가 708조에 달한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한국의 경제발전에 도움이 됐지만 일본도 엄청나게 이득을 보았다. 결국 두 나라가 ‘윈윈(win-win)’한 셈이다.”
 
일본의 진정성은 우리에게 늘 불신과 회의의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인가?
 
“국교정상화 초기 일본이 한국에 투자하거나 도와준 산업은 기술 수준이 낮고 환경오염 요인이 큰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한국이 잘 살게 된 건 일본 덕인데 한국은 일본을 적대시한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게다가 과거사를 사과하라고 해서 마지못해 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일본 일각에서 사실은 사과할 일이 없고 사과한 게 아니라는 식의 발언이 나온다. 야스쿠니신사 문제만 해도 그렇다. 야스쿠니에 묻혀있는 사람들은 일본 국민에게도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인데, 중요 인사들이 계속 참배를 한다. 그래서 진정성을 느끼기 힘든 것이다.”
 
시각을 달리해서 일본도 장점이 많은 나라인데.
 
“우선 일본은 패전 이후 곧바로 군국주의를 탈피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체제를 도입했다. 그 결과 현재 아시아에서 민주화 수준이 제일 높은 나라의 하나로 평가된다. 두 번째는 평화적인 나라다. (사실상 아베 정권 이후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돌아갔지만) 현재까지는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를 위협하거나, 군사적 태세를 갖춘 적이 없었다. 전쟁 문제를 미국에게 맡기고 한 발짝 물러서 있다. 그리고 일본은 제3세계 국가 원조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은 긴 역사의 세월을 함께했기 때문에, 풀어야 할 과제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이 문제들을 차치하고, 한국도 일본의 좋은 면은 좋은 면대로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 점을 자주 강조하셨다.”
 
“WTO로 가도 해결 쉽지 않다”
한국에 대한 규제에 앞서 아베 일본 총리(왼쪽)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교감 있었다는 추측이 나온다. / 사진:연합뉴스

한국에 대한 규제에 앞서 아베 일본 총리(왼쪽)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교감 있었다는 추측이 나온다. / 사진:연합뉴스

공감한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답은 외교로 푸는 수밖에 없다. 이 문제를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서만 풀기는 힘들다. 일본이 이번에 제기한 문제 중 하나가 북한 문제였다. ‘첨단기술 소재를 북한에게 줬을 수도 있다’, 이런 얘기를 했는데, 그 근저에는 ‘한국이 북한과 너무 친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라 교수는 “북한 간첩선이나 특수 부대들의 첨단 장비들은 일제가 많다”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어선으로 위장할 수 있는 레이더, 위치추적 장치 등 일제를 수없이 봐 왔다. 그래서 주일 한국 대사 시절 북한이 주로 수입해서 쓰는 장비를 생산하는 공장을 가본 일도 있다. 아웅산 테러 때 북한이 사용한 선박도 일본에서 간 것이었다.”
 
일본이 갖는 혐한의 근원을 무엇일까?
 
“일본 입장에서 봤을 땐, 북한은 한국을 위협하고 있는데 한국은 북한이 군사적으로 위협을 가한 것이 아니라며 ‘편 들어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그런 한국이 정작 일본에게는 적대적이니까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 문제만은 아닐 것 같은데.
 
“위안부 문제만 해도 미국이 상당한 역할을 해서 일본 내부의 일부 반발에도 불구하고 한·일 양국이 합의에 이르렀다. 그런데 한국의 정권이 바뀌니까 합의 자체가 뒤집어졌다. 독도 문제에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 얘기가 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때마다 한국이 같이 들고 일어나는데 러시아를 보라고 하셨다. 일본의 북방 4도를 차지한 러시아는 그 섬들을 실효적으로 점령하고 있기에 일본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일본이 한국전쟁 등 한반도의 불행을 틈타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그걸 우리가 탓할 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마 일본이 호주와 같이 더 먼 곳에 있었다면 우리가 한국전쟁을 못 치렀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한·일이 갈등 현안을 다룰 때 특히 유의해야 할 교훈을 꼽는다면.
 
“두 나라는 갈등이 생기면 상대의 동기와 의도부터 따진다. 정치인들은 특히 그렇다. 문제는 문제 그 자체로 처리하도록 해야 한다. 일본은 한국 정부 더러 친북, 반일 성향이 있어서, 반미정권이라서 이미 타결한 합의안도 뒤집는다고 간주한다. 한국이 일본에 일부러 싸움을 건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일본의 아베 정권이 참의원 선거 때문에 무리한 조치를 취한다고 비난한다. 그렇게 해선 근본적인 해결책을 내놓기 어렵다. (과거사 문제에 일본이 소홀한 것이 있긴 하지만) 문제를 토의하고 해결할 수 있는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찾아야 한다.”
 
국교 정상화 이후 지금처럼 한·일이 치열하게 격돌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런 문제를 푸는 글로벌 스탠다드 같은 게 있지 않을까.
 
“그게 바로 WTO(세계무역기구)다. 문제는 WTO가 예전 같은 상황이 아닐 뿐더러 절차를 밟는 사이에 우리 경제는 골병이 든다. 결국 한·일 관계는 한·미·일 세 나라가 같이 풀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중요한 건 미국의 태도다. 해당 사안에 대해서는 미국도 생각해야 할 여러 문제가 존재한다. 한국과 관련된 문제, 북한 문제, 중국 문제, 가깝게는 유엔군사령부(유엔사) 강화 문제 등등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은 미국이 쉽게 우리나라 편을 들거나 위안부 문제 등을 놓고 일본에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지금은 전처럼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미국은 당분간 관망할 것”
라 교수는 미국이 중재의 대가를 한국에 요구할 수 있다고 봤다.

라 교수는 미국이 중재의 대가를 한국에 요구할 수 있다고 봤다.

우리가 중재를 기대하는 미국의 속마음을 짚어본다면?
 
“현재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미국의 유엔사 강화 방안이다. 주한미군사령부는 최근 발간한 [주한미군 2019 전략 다이제스트]에서 유엔사 역할과 관련해 ‘위기 시 필요한 일본과의 지원 및 전력 협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유엔사와 일본의 지원 및 전력 협력’이란 문구가 들어간 것은 처음이다.”
 
왜 그렇게 된 것인가.
 
“미국 혼자서 한국을 방어하기 힘들다는 이유를 유엔사 강화 명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와 별도로 유엔사에 일본이 참여하면 일본에 있는 미군의 주력기지 활용이 편리해지는 측면도 있다. 일본의 유엔사 참여는 북한이 반대하고, 한국 정부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반대로 미국은 유엔사 강화에 일본뿐만 아니라 독일도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한·일 간의 문제는 한·일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이 언제까지 이렇게 관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상황을 지켜보다가 얘기 좀 하자고 나서지 않을까. 이번에 우리 정부가 일본하고 대화하자고 제안했는데, 일본이 갑자기 과장급 회담으로 격을 낮췄다. 이런 형세는 우리한테 좋은 게 아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국회대표단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막상 자꾸 보냈다가 홀대만 받고 오면 감정만 상할 수 있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일본은 한국과 등을 돌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차피 자기들은 손익을 따져봐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일본이 한국과 잘 지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근거가 적어도 한·미·일 세 나라는 추구하는 이념, 가치가 같고 동북아 안정의 축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현재로선 한국에 그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위기의식도 있겠다.
 
“첨단산업 분야에서 한국에 역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한국을 경쟁자로 취급한다. 가령 삼성이나 LG같은 기업이 일부 일본 기업을 경쟁력에서 앞서지 않나. 이번 수출 통제를 통해 일본이 기술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는 조금 손해를 볼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일본이 이 정도로 세게 나오는 것은 미국의 양해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개인적인 견해로는 아베가 미국하고 전혀 의견 교환이 없이 이런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미국은 사전에 알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 정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여하간 미국은 관망하는 자세를 유지하리라 본다. 이 기간이 우리에게 중요하다. 미국의 역할은 한·일 관계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미국이 중재역할을 한다면 미국이 무엇을 바랄 것인가도 함께 생각해봐야한다. 애당초 경제 문제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순신의 12척’ 비유, 적절하지 않다”
미국은 호주-일본-인도를 잇는 인도태평양전략을 통해 중국 봉쇄에 최우선 가치를 두는 듯하다. 한·미동맹의 한 축인 한국이 인도태평양전략에 적극 참여하거나 원유 수출선인 호르무즈해협에 파병하는 방안 등도 한·미 간 주요 관심사로 거론된다.
 
“우리가 호르무즈 해협에 군함을 안 보낼 수 없지 않을까. 한국은 원유의 70% 가량을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들여온다. 원유 의존도가 높고 더구나 우리는 앞으로 원자력 발전도 줄여나가지 않나.”
 
러시아가 불화수소 공급을 제안하고 우리 정부가 이에 대한 검토를 한다는 얘기가 들린다.
 
“러시아 소재로 대체한다는 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기술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도 러시아와 말썽이 발생하면 일본과의 협의보다 더 수월할 것인가?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소재였다면 애당초 문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라 교수는 언젠가 ‘위기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지도자의 자질’이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지도자는 어떤 자질을 발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전남을 방문한 자리에서 “전남 주민들이 이순신 장군과 함께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고 말했다. 결의를 다지는 모습으로 비쳐졌는데.
 
“미신불사(微臣不死) 상유십이(尙有十二), 감동적인 말들이지만 국정을 담당한 분들이 즐겨 쓰면 곤란하다. 이들 모두가 국정을 책임진 분들의 실패 때문에 생긴 일들이다. 거룩하고 감동적인 말들이지만 국정을 책임진 분들은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닌가. 외국과 문제가 생겼을 때 국정을 담당하는 분들이 이런 식으로 대처하면 안 된다. 외적이 침략하면 의병이 아니라 국군이 이를 막아야 한다. 이순신 장군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지만 당시 조정은 참으로 못난, 못된 조정이 아니었나. 한·일 관계와 관련해 우리 정부는 지금까지 준비를 제대로 했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일본을 어떻게 대할 때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지금은 특사를 제대로 받아줄지도 의문이고, 국회의원 몇 십 명이 가더라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감정적인 대응을 우선 삼가고 이성적으로 도덕적으로 한 차원 높은 대응을 하면서 합리적인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일본에도 자유롭고 양심적인 여론이 있다.”
 
주일 한국대사로 3년 정도 일본에서 근무했다. 지금도 일본 인사들과 교류가 있는 것으로 안다. 직접 살아보고 만나 본 일본, 일본인들의 특징을 들자면?
 
“몇 년 살았다고 알겠느냐마는 한 가지 독특한 게 있었다. 천황이라는 존재다. 일본 국민에게 엄청난 존재이자 정신적 지주더라. 그런데 일본에서 황실이 가장 리버럴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 제일 친한(親韓)적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한국은 일본 황실부터 비난하곤 했다. 지금 일본에서는 아베 총리가 굉장히 독단적인 국정운영을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심지어 내각과 상의하지 않은 채 결정을 독단적으로 내린다는 비판도 있다. 결국은 합리적이고 온당한 반응이 국제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일 관계에서도 가장 좋은 노선이라고 믿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내의 폭넓은 합의다. 세계대전 후 4개국 분할 점령의 어려운 상황에서 10년 만에 외국군의 철수와 독립을 성취한 오스트리아 초대 대통령 레오폴드 피글은 이런 말을 남겼다. ‘최선의 외교 정책은 국민의 합의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말 아닐까?”
 
 
대담 박성현 월간중앙 편집장 park.sunghyun@joongang.co.kr / 사진 전민규 기자 jun.minkyu@joongang.co.kr / 정리 박호수 월간중앙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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