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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KK' 갑질문화에 찌든 공무원, 괴롭힘 금지법에 두번 운다

중앙일보 2019.07.24 06:00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1. 20대 여교사인 A씨는 학교 발령 초기부터 조리사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다. 점심시간에 학교 식당에 가면 50대 아주머니인 조리사가 “팍팍 좀 먹어” “그렇게 빼빼 마른 여자는 남자들이 안 좋아해”라고 하대하며 큰소리로 말을 걸어와서다.  
 
A교사는 “친근함의 표현이라고 생각하지만, 학생도 있는 자리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니 식당 가기가 불편해 도시락을 싸갖고 다닌다”며 “조리사에게 조심해 달라고 얘기하려다가도 ‘무시한다’고 받아들일까봐 꾹 참고 있다”고 말했다.
 
#2. 중앙부처 사무관인 B씨는 얼마 전 보고서를 잘못 썼다는 이유로 과장에게 “왜 이렇게 멍청하냐. 대학 나온 거 맞느냐”는 폭언을 들었다. B씨는 “동료들 지켜보는 앞에서 막말을 하고, 보고서를 집어 던지는데 한마디 대꾸도 못했다. 모욕감을 느꼈지만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고 토로했다.  
 
이달 16일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됐지만 공무원인 A교사나 B사무관에겐 남의 집 얘기로 들린다. 괴롭힘 금지법은 근로자가 대상이다. 근로기준법 대상이 아니라 국가·지방공무원법의 적용을 받는 공무원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공무원 사이에 볼멘소리가 나온다.  
 
서울특별시공무원노동조합(서공노)은 23일 “공무원도 괴롭힘을 당했을 때 구제받을 수 있도록 공무원 복무규정이나 행동강령을 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용수 서공노 위원장은 “공무원은 일반 근로자와 유사한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해도 폭행·상해·모욕·명예훼손·협박 등 형사 처벌에 해당하는 수준이 아니면 마땅한 구제 방법이 없다”고 설명했다.  
 
중앙부처 주무관인 C씨는 “긴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과장이 휴일 출근을 강요할 때가 잦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과장이) 월요일에 출근해서 처리해도 충분한 일인데 굳이 일요일에 일을 시킵니다. 중간에 식사하고 들어오면 일하는 시간보다 밖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더 긴 것 같아요. 가족과 보내야 할 주말을 날리는 것 같아서 너무 짜증 납니다. 하지만 인사 평가나 배치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어 불만을 드러낼 수가 없어요.”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된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한 시민단체가 갑질금지법 시행맞이 슬기로운 직장생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우상조 기자/20190716

직장내 괴롭힘 방지법'이 시행된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한 시민단체가 갑질금지법 시행맞이 슬기로운 직장생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우상조 기자/20190716

 
다른 중앙부처에 근무하는 D사무관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그는 “공무원처럼 위계질서가 명확한 조직이 없다”며 “여전히 변하지 않는 ‘SSKK(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면 까라는 대로)’ 문화 때문에 신입 공무원들이 피로함을 호소한다”고 전했다.  
 
지방 소도시에서 근무하는 E주무관은 지역 축제 때마다 잡무에 동원된다. 그는 “근무시간으로 인정되지 않는데 행사에서 서빙을 할 때가 잦다. 그런 날마다 야근을 해야 하는데 답답한 심정을 호소할 데가 없다”고 했다.  
 
경남의 한 군청에서 근무하는 9급 공무원 F씨는 집이 멀어 군청 근처 원룸에서 자취하고 있다. 하지만 상사가 밤마다 불러내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는 “회식도 아니고 단둘이나 한두 명 동료를 끼워서 술자리를 만든다. 퇴근 이후에는 사생활을 존중해줘야 하는데 주 1~2회 이런 식으로 불러내니 짜증이 난다”고 했다. 이어 “민원인하고 같이하는 자리를 만들고 술값도 민원인에게 떠안길 때가 있어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에 걸릴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서울의 한 구청에 다니는 G주무관은 상사의 의도적인 따돌림과 차별대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그의 상사는 자신이 신뢰하는 직원 몇몇과만 주요 현안을 공유하고 논의한다고 한다. 그는 “카카오톡 단체방을 따로 만들어 끼리끼리 식사를 하거나 모임을 갖는다. 나중에 항의했더니 대수롭지 않게 반응해 정말 황당했다”고 말했다.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기자aseokim@joongang.co.kr

 
국회가 있는 여의도에서도 갑질을 호소하고 있다. 지난달 국회 보좌관들의 페이스북 계정인 ‘여의도 옆 대나무숲’에 올라온 H씨는 “의원 보좌진은 국가공무원이다. 그러나 정작 영감(국회의원)들은 보좌진을 공무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노비 정도로 여기는 모양이다”고 글을 남겼다. H씨는 “의원들은 의정 활동과 관련 없는 잡다한 일을 보좌진에게 지시한다”며 “아침밥 차리기, 택배 수령, 속옷 챙기기 등 입에 담기도 창피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그는 “만약 기업에서 직원에게 업무와 관련 없는 개인 택배를 받아오라 한다면 용납될 수 있을까”라고 지적했다.
 
공무원 사회에서도 이른바 ‘갑질’ 문화를 바꾸려는 움직임이 없는 게 아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해 12월 공무원 행동강령에 직무권한 등을 행사한 부당행위를 금지하는 항목을 신설했다. 이를 어기면 국민권익위에 신고할 수 있으며 해당 공무원을 징계할 수 있다. 하지만 괴롭힘 방지법과 달리 갑질 금지의 범위가 좁다. 고용노동부가 제시한 괴롭힘 방지법 메뉴얼에 따르면 개인사 뒷담화나 소문 퍼트리기, 음주·흡연 강요, 온라인에서 모욕감 주는 언행 등 세세한 것까지 괴롭힘에 들어간다. 
 
이 때문에 공무원 노조 측은 권익위의 공무원 행동강령만으로 괴롭힘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과 차원이 다르다는 입장이다. 서공노는 “민간 부분과 같이 공무원에게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공무원도 강령에 둘 것이 아니라 법을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주석 공무원노동조합총연맹 제도개선위원장은 “직장 내 괴롭힘에서 공무원이 빠진 것은 다소 아쉬운 부분”이라며 “앞으로도 제도 개선과 적극적 활동을 통해 직장 내 갑질을 개선해 나갈 것이다”고 말했다. 게다가 공무원 행동강령에는 사법부나 입법부의 공무원은 해당되지 않는다.
 
인사혁신처관계자는 "지난 4월 공무원 징계령과 시행규칙을 고쳐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부당행위에 대해 징계를 강화했다"며 “괴롭힘 금지법 시행에 맞춰 공직사회의 갑질을 엄벌하기 위해 갑질 공무원 명단과 행위를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해리·윤상언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
 
◇수정=공무원 징계령과 시행규칙 개정이 진행 중인 게 아니라 4월에 개정이 완료돼 이를 기사에 반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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