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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소재 국산화 못한 게 대기업 책임?

중앙일보 2019.07.24 00:43 종합 27면 지면보기
최지영 산업2팀장

최지영 산업2팀장

논쟁이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튀고 있다. 정부와 여당 핵심 관계자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대기업 책임론’ 얘기다. 한국이 반도체·디스플레이·휴대폰 강국이 될 동안 후방 산업에 소홀했고, 대기업이 부품·소재 중소기업 육성을 등한시해 우리 대표 산업이 일본에 치명적 약점을 잡혔다는 인식이다.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소재 국산화를 미리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걸 못한 게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대기업의 잘못은 아니다. 지금 갖춰진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 체제는 글로벌 분업화의 결과다. 업체마다 제일 잘 만든 소재·부품을 구해 이를 최적화해 생산 가능한 최고 수준의 제품을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일본 수출 규제 3대 품목 중 하나인 고순도 불화수소만 놓고 보자. 불화수소는 반도체 소재인 웨이퍼에 회로를 그려 넣은 뒤 깎아내는 에칭(식각) 공정에 쓰인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불순물 제거 공정에도 이용된다. D램과 낸드플래시에 쓰이는 건 고순도 제품이다. 올레드(OLED) 디스플레이에 쓰이는 건 그보다 좀 떨어지지만 여전히 고순도며, LCD 디스플레이에 쓰이는 건 또 그보다 품질이 낮아도 된다. 일본 수출 규제가 닥치자 LCD 디스플레이용 불화수소는 LG디스플레이가 이미 국내산 제품을 공정에 테스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가 다른 업체들보다 여유 있는 이유는 공정 특성에 따른 것이지, 그간 국산화에 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은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무역협회 수치 기준 불화수소의 올해 1~5월의 일본 수입 의존도는 43.9%다. 한해 일본에서 들여오는 고순도 불화수소는 1000억원 어치도 안되지만, 세계 최고 품질을 지녔다. 직접 개발하는데 비용을 들이는 것보단 원하는 스펙에 딱 맞춘 세계 최고 품질을 구매하는 게 그동안엔 당연히 효율적이었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해외 주요 반도체 업체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의 300여개 반도체 제조 공정을 아우르는 제조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300여개 공정에 필수적인 소재와 장비는 일본을 비롯한 다른 나라가 최고 기술력을 가진 경우가 많다. 한 예로 삼성전자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극자외선(EUV) 공정에 필수적이며, 대당 1500억원 안팎의 초고가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 ASML이 세계 최강자다. 이런 각각의 소재·장비를 조합해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를 한발 빠르게 만들어 내는 게 지금까지 한국 대기업의 경쟁력이었고, 이는 깎아내려선 안 된다. 이 모든 걸 직접 하면서 10년 전부터 세계 최고로 올라오긴 불가능했을 터다.
 
업계 얘기를 들어보면 국내 대기업들은 고순도 불화수소를 비롯해 포토레지스트,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일본의 3대 수출 규제 품목 대체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수율이 문제겠지만 몇 달 안에 라인을 세울 정도의 극심한 피해는 피할 수 있을 듯싶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드러난 3개 품목은 기업들이 백방의 노력으로 해결해 내겠지만, 한국이 화이트 리스트 국가에서 배제되면 추가 규제될 가능성이 있는 품목들은 또 어쩔 것인가. 집적회로(IC), 전력 반도체(PMIC), 리소그래피 장비, 이온 주입기, 웨이퍼, 블랭크 마스크 같은 것들이 규제 품목으로 확정될 때마다 모두 국산화하거나 대체 수입국을 구하기란 현재 글로벌 분업 체제에서 불가능에 가깝다.
 
“국산화로 장기화에 대비하자”는 구호 외에, 상황을 수습할 양국 정부의 ‘엑시트 전략’이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기업들은 한국 정부의 다음 움직임이 뭘지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다.
 
최지영 산업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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