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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판 '살인의 추억' 10년···실오라기가 뒤집진 못했다

중앙일보 2019.07.22 00:03 종합 24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이 간다] 제주 보육교사 살인사건 재판 
제주 보육교사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박모씨가 지난해 12월 대구에서 검거돼 제주국제공항을 통해 압송되고 있다. 그는 구속된 뒤 재판에 넘겨졌으나 지난 11일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뉴스1]

제주 보육교사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박모씨가 지난해 12월 대구에서 검거돼 제주국제공항을 통해 압송되고 있다. 그는 구속된 뒤 재판에 넘겨졌으나 지난 11일 1심 선고공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됐다. [뉴스1]

지난주 수요일(17일)이었다. 제주지방검찰청이 강간 등 살인 혐의로 기소된 박 모(50)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1심 판결에 대해 항소했다. 박씨는 ‘제주판 살인의 추억’으로 불리는 2009년 보육교사 살인 사건의 피고인이다. 법원은 왜 박씨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그는 진범일까, 아닐까.
  

10년 만에 법정에 선 택시기사
수상한 행적 속 직접증거 없어
1심 “대량생산된 섬유 … 무죄”
검찰 “증거 교집합은 한 명뿐”

“재판 끝나면 누가 인터뷰하실 거예요?” 지난 11일 오후 1시 50분 제주지방법원 201호 법정 앞. 취재수첩을 든 한 기자가 형사들에게 물었다. 얇은 점퍼 차림의 강력계 형사들이 빙긋이 웃으며 답했다. “판결 나오고 얘기합시다.”  
 
잠시 후 재판부 세 명이 법정에 들어왔다. “2019 고합O호 박OO 피고인에 대한 선고공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황토색 수의를 입고 뿔테 안경을 쓴 박씨가 들어왔다. 앞서 검찰은 지난달 13일 “여성을 강간하는 데 실패하자 살해한 뒤 차가운 배수로에 방치했다”며 그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부검 결과로 수사 대상에서 제외된 용의자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정말 이럴 줄도 몰랐고 더(너)가 싫어진다.’ 2009년 2월 1일 새벽이었다. 제주시의 한 어린이집 보육교사 A씨가 남자친구와 다툰 뒤 집에 가려고 거리로 나왔다. 콜센터에 택시 배차를 문의하면서 남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오전 3시 8분 A씨는 114로 전화를 걸었다가 1초 만에 끊었다.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신호였다.
 
같은 달 8일 오후 A씨는 제주시 애월읍 인근 농업용 배수로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목 졸림에 의한 사망. 경찰은 A씨가 114에 전화를 걸었다가 때마침 지나가던 빈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한 것으로 추정했다. A씨 집 위치로 볼 때 외도 차량번호판독기가 설치된 지점을 통과해 일주도로로 가는 경로(지도 ②번 경로)였을 것으로 봤다.
 
박씨가 운전한 택시가 당일 오전 3시 14분 판독기를 통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의 택시는 CCTV 영상에 나온 범인 추정 차량과 유사했다. 박씨 휴대전화에서 사건 전후 이틀간의 통화내역이 삭제돼 있기도 했다. 하지만 ‘사체 발견 시점으로부터 24시간 이내에 사망했다’는 부검 결과가 나오면서 박씨는 용의 선상에서 제외됐다.
  
경찰, 동물 실험 거쳐 9년 만에 박씨 구속
 
“동물 사체 훼손을 막기 위해 실험 현장에서 24시간 경계 근무를 했습니다. 차량 배기가스가 주변 온도에 영향을 줄까 봐, 히터도 틀지 못하고 추위에 떨어야 했습니다.”(제주경찰청 양수진 강력계장)
 
지난해 1~3월 제주경찰청 미제사건 수사팀은 국내에서 유례가 없던 ‘동물 사체 실험’을 했다. A씨가 입고 있던 같은 재질·색상의 무스탕을 돼지와 개 사체에 입히고 부패 정도와 체온 변화를 측정했다. 사후 일주일간 사체 온도가 기온보다 낮아졌다 다시 높아지고, 내부 장기 부패가 지연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망 추정 시점은 실종 당일로 앞당겨졌다.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경찰은 다시 박씨를 용의 선상에 올렸다. 기존 증거물 재분석을 통해 박씨 택시에서 A씨 상의 니트와 유사한 소재의 실오라기를 확보한 데 이어 A씨 옷과 신체, 가방에서 박씨가 입었던 남방의 진청색 면섬유와 유사한 실오라기를 추가로 확보했다. 두 번의 구속영장 청구 끝에 지난해 12월 영장이 발부됐다.
  
“미세섬유만으로 접촉했다고 단정 못 해”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대량생산된 섬유라면 검출됐다고 하더라도 피고인과 피해자가 반드시 접촉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재판장인 정봉기 부장판사는 차분한 목소리로 판결을 읽어 내려갔다. 미세섬유가 유사하다는 사실만 갖고는 A씨가 박씨 택시에 탔다고 볼 수 없다는 얘기였다. 경찰이 박씨 주거지에서 압수했던 청바지도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로 판단하고, 청바지에서 나온 미세섬유의 증거능력도 인정하지 않았다.
 
정 부장판사는 “실종 당시 피해자가 제3자가 운전한 차량 또는 택시에 탑승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특히 경찰이 추정한 범인 차량의 이동 경로(②번 경로)가 틀렸을 가능성을 지적했다. “실종 장소에서 피해자 집까지 185명의 택시 기사 중 134명이 ②경로를 선택하였으나 49명은 ①경로, 2명은 ③경로를 선택하였는데, 경로는 운전자에 따라 다양할 수밖에 없으므로….”
 
“피고인. 자리에서 일어서세요. 주문. 피고인은 무죄.”
 
“아….” 판결이 선고되는 50여분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박씨는 긴 한숨을 내쉬며 울먹였다.
 
 
“피고인·피해자 미세섬유 교차해 검출돼”
 
“모든 증거들이 피고인 박씨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장기석 제주지검 차장검사는 “항소심에서 청바지의 증거능력과 미세섬유 등의 증명력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와 피고인 옷의 미세섬유가 상호 교차해서 나타났습니다. 여기에 청바지, CCTV 영상, 당시 행적까지 개별적 증거들이 산재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교집합에 있는 인물은 박씨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재판부도 판결문에서 박씨에게 불리한 정황이 있다는 점을 인정했다. ▶박씨가 사건 당일 자신의 행적에 관해 불일치하고 일관성 없는 진술을 하고 있고 ▶박씨가 당일 주행했다고 주장하는 장소의 CCTV에 박씨 택시가 촬영되지 않았고 ▶박씨는 재수사 착수 후 ‘유의미한 증거 확보’라는 기사를 보고 ‘유의미하다’는 단어 뜻을 검색하기도 했다.
 
양수진 강력계장은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도민들은 알아요. 특히 ③번 경로는 컴컴해서 안 갑니다. 심야에 중산간도로로 가면 승객들이 놀라요. 범인이 100% 확실합니다. 거짓말탐지기 조사에서 범인만 알 수 있는 걸 알고 있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경찰, 대상을 너무 좁혀놓고 수사했다”
 
“진술에 일관성이 없고, 수상한 점이 많다고요? 저도 살인사건 용의자로 조사받게 되면 앞뒤가 안 맞는 진술을 할 것 같은데요.”  
 
박씨를 변호했던 최영 변호사에게  "박씨가 진범이 아니라고 확신하느냐”고 물었다.
 
“피고인 본인은 ‘죽어도 안 했다’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너무 부족한 증거로 10년 동안 너무 큰 고통을 받았다는 것이다. ‘범인 없는 피해자’가 된 피해자와 그 가족도 마찬가지다.”
 
재판에서 주력한 부분은.
“이동 경로나 CCTV 영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봤다. 가장 중요한 건 피해자가 피고인 택시에 탔느냐다. 그래서 미세섬유에 집중했다. 문제의 진청색 면섬유는 양말, 속옷, 바지에서도 나올 수 있다. 국과수에서 미세섬유를 감정한 증인에게 ‘유사한 것이냐, 동일한 것이냐’를 물었다. 그 증인조차 동일성을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수사에 문제점이 있다면.
“‘②번 경로로 이동해 당일 오전 3시 10분~3시 50분 외도 판독기를 통과한 택시’로 대상을 지나치게 좁혀놓고 수사했다. 아는 사람을 만나 다른 경로로 갔을 수도 있고, 다른 시간대에 판독기를 통과했을 수도 있다. 택시가 아닌 일반 차량을 탔을 수도 있다.”
 
 
경찰의 재수사를 나무랄 수는 없다. 10년 전 미제로 끝났던 사건을 끈질긴 노력 끝에 되살려놓은 것은 분명 인정할 만하다. 실오라기 하나라도 찾아내 범인을 잡고 말겠다는 형사들의 의지가 살아 있을 때, 우리는 조금 더 안전해진다.  
 
아쉬운 것은 초동 수사다. 좀 더 범위를 넓게 잡고 수사할 순 없었을까. 용의자 박씨의 수상한 행적에만 너무 집착했던 것 아닐까. 첫 부검 결과가 혼선을 부른 것도 부인하기 힘들다. 최소한 강력사건에 대해선 초동 수사를 ‘시차 없이’ 검증하고 피드백하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제 검찰 항소로 박씨는 또 한 번 법정에 서야 한다. ‘직접증거 없이 간접증거만으로도 유죄가 인정될 수 있으나, 간접사실의 인정은 합리적 의심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의 증명이 있어야 한다.’(대법원 판례) 검찰과 경찰은 이 판례의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항소심 재판부는 증거로 제시된 실오라기들에 대해 과연 어떻게 판단할까.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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