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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혁백의 퍼스펙티브] 아베의 경제 도발은 국익 앞세운 현실주의로 대응해야

중앙일보 2019.07.22 00:03 종합 26면 지면보기
한·일 갈등의 뿌리와 해법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한반도는 일본의 심장을 겨누는 비수이다.” 독일 군인으로 메이지 시대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초빙됐던 K.W.J. 메켈이 한반도를 두고 한 말이다. 조선 시대 이래 한·일 관계는 경제보다는 정치가 결정해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치권력 야욕을 채우기 위해 조선 출병을 감행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 지도자들은 중국을 침략하기 위해 한반도를 병탄하였다. 현재 아베가 벌이고 있는 반도체 소재 등의 수출 규제 도발도 기본적으로 경제와 기술의 갑주(甲冑)로 무장한 정치적 도발이다. 따라서 소재 전쟁의 해결도 경제가 아니라 정치에서 찾아야 한다.
 
아베가 소재 전쟁을 일으키게 한 구조적 변화는 포스트 세계화 시대의 도래다. 브렉시트와 트럼피즘이 상징적으로 보여준 포스트 세계화 시대는 보호주의, 자국 이익 우선주의, 종족적 민족주의, 포퓰리즘, 비자유주의적 스트롱맨의 등장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신군국주의를 주장하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인 아베는 포스트 세계화 시대의 일본을 이끄는 스트롱맨이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일본은 버블 경제의 붕괴로 저성장, 규제 강화, 소비 위축 등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뉴노멀 시대에 접어들었다. 뉴노멀 시대에 보통 일본 사람들은 경제를 살릴 수 있는 강력한 리더를 요구했고 국수주의자이자 비자유주의적 스트롱맨인 아베가 선택되었다. 아베는 혐한·혐중·혐북 여론을 이용하여 외부 경쟁자에 대한 증오에 기반을 둔 포퓰리즘으로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아베가 ‘한국 때리기’에 나선 이유
 
포스트 세계화 시대에 트럼프가 중국을 포위 견제하기 위한 인도·태평양 안보 체제를 구축하자, 아베는 한국이 인도·태평양 체제의 중추로 포함되는데 반대했다. 이에 대응해 한국은 한·미 동맹 강화, 북·미 대화 추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통해 일본의 참여 없이 안보 딜레마를 해소하려 하였다. 이에 아베는 북·일 직접 대화를 시도하여 일본 패싱을 저지하려 하였으나 실패했고, 다시 ‘한국 때리기’ 전략으로 복귀했다.
 
역사적으로 일본의 동아시아 출병은 경제적 제국주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지정학적 영토 전쟁이었다. 임진년(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한반도에 출병한 것은 영토적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지 오사카 상인들의 이윤을 확보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식민지 한반도에 경부선 철도를 깐 주역은 재벌과 은행가가 아니라 중국 침략을 위한 병참로를 건설하려는 메이지 사무라이들이었다.
 
메이지 사무라이들은 세계를 지정학적으로 바라보았다. 메이지 국수주의의 원조인 요시다 쇼인이 세운 쇼카손주쿠(松下村塾)가 배출한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비수론’을 통해 한반도는 일본 안보 딜레마의 원천이기 때문에 한국을 정복하여 안보 불안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는 정한론을 주장하였다. 비수론에 근거한 정한론은 대동아공영권 건설로 이어졌고, 기시 노부스케를 거쳐, 기시의 외손자인 아베로 계승되고 있다. 비수론에 대해 한국과 중국의 지도자들은 한반도는 일본과 같은 해양세력이 중국을 향해 겨누는 방아쇠라는 ‘방아쇠론’으로 대응하면서, 일본이 한반도를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다리’로 이용해왔다고 비판하였다.
  
일본에서 거세지는 신정한론
 
한국은 그간 정보 고속화 인프라의 성공적 구축으로 IT 혁명에서 선두 주자로 올라섰고, 디지털 산업에서 일본을 따라잡았고,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에서는 일본을 추월하였다. 한국은 IT 혁명을 통해 ‘따라잡기’ 근대화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었고 21세기에 유일하게 후발 국가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러한 한국의 약진에 대응하여 일본의 국수주의자들은 기술 패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왕에 일본이 우위를 유지하고 있는 소재와 부품의 대 한국 수출 통제를 통해 한국이 일본을 추월하기 전에 싹을 자른다는 신정한론을 실천에 옮기고 있다.
 
아베의 수출 규제 도발의 핵심 배경에는 쇼인·아리토모·노부스케·아베로 이어지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가 있다. 아베는 국수주의적 민족주의를 부활시켜 헌법 개정, 보통 국가, 부국강병 일본을 건설하려 한다. 한국은 이러한 국수주의적 민족주의 부활 시도에 대해 저항적 민족주의로 대응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저항적 민족주의를 호명(독립운동, 3·1운동, 임시정부)하자, 한국과 일본은 징용 배상 처리와 같은 문제에서 날카롭게 충돌하고 있다.
  
아베가 도발에 나선 5가지 이유
 
아베가 일본이 독과점한 첨단 소재인 리지스트, 에칭 가스, 플루오린 폴리아마이드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감행한 이유로는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일제 강점기 강제 노역자에 대한 대법원 배상 판결에 대해 수출 규제로 보복함으로써 신정한론에 대한 한국의 반발을 억누르고 국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끌어올리기 위해서이다. 둘째, 단골 선거 캠페인 소재였던 ‘북한 때리기’가 북·미 화해로 약효가 떨어진 시점에서 ‘한국 때리기’로 참의원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이다. 셋째, 미·중 패권 전쟁 시대에 동북아에서 일본의 파워와 위신을 강화하고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넷째, 4차 산업혁명시대에 동아시아 기술 패권 경쟁에서 한국에 선두를 뺏기지 않으려는 고육지책이다. 다섯째, 보통 국가 일본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한국과의 문화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이다.
  
한·일 정치·문화 갈등 해소 나서야
 
아베는 자유무역 전도사로 자처했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직후 자유무역주의와 배치되는 보호주의적 한국 수출 규제를 발표함으로써 세계를 경악시켰다. 아베의 수출 규제는 한·일 간 정체성 갈등에 대한 경제적 보복이고, 참의원 선거 승리라는 국내 정치용으로 내려진 조치이며, 트럼프의 ‘중국 때리기’에서 배워 한국을 때리는 ‘작은 사이즈의 트럼프’ 같은 행동이라고 조롱을 받으며, 국제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또 소재 수출 금지는 첨단 산업 공급사슬의 상류 지역(upstream)을 차단함으로써 중간재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을 중단시키고, 하류 지역(downstream)에 있는 애플·구글·아마존과 같은 팡(FAANG) 기업들의 첨단 기술 제품의 생산라인을 멈추게 하는 가공할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의 글로벌 기술 기업들과 일전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계속할 수 없다. 따라서 한국은 궁극적으로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철저하게 국익에 바탕을 둔 현실주의적 대응을 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첫째, 대미국 편승전략을 강화해야 한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LG전자의 미국 공장 증설과 신설로 트럼프의 리쇼어링(reshoring) 정책을 지원하여, 트럼프가 아베가 도발을 철회하도록 압력을 가하도록 해야 한다. 둘째, 한국과 일본의 국제주의자들간의 동조화(coupling)를 강화해 한·일 간의 선린·우호 관계를 바라는 세력이 양국의 주류가 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한·일 갈등이 징용 배상을 둘러싼 문화 갈등에서 나온 만큼 정치 갈등, 문화 갈등의 해결을 통하여 경제 기술 갈등을 해결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첫째, 자강·자립을 통한 내적 균형(internal balancing) 전략을 통해 첨단 산업의 소재와 부품 기술 개발과 생산을 육성·지원하여 소재와 부품에 대한 외부 의존도를 낮추어야 한다. 둘째, 외적 균형(external balancing) 전략을 통해 일본과 중국과의 경쟁에서 모자라는 부분을 채워주고 균형을 이루어줄 수 있는 한·미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광주과기원 석좌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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