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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대 曰] 배상과 보상의 차이

중앙선데이 2019.07.20 00:21 645호 30면 지면보기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일본이 한국을 식민 지배한 것은 불법인가 합법인가. 한국인에게 이런 질문을 하면 아마 대부분 그렇게 묻는 사람의 얼굴을 다시 쳐다볼 것이다. 침략이 당연히 불법이지 무슨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질문을 하느냐는 뜻이다. 같은 질문을 일본인에게 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한국에 손해를 끼친 사실을 미안해하는 양심적 일본인조차도 선뜻 답변하지 못한다.
 

광복 이전과 이후 역사와 현실 변화
일본 존중하지만 침략 미화해서야

일본의 한국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2010년에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한국병합 100년 한·일 지식인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가 ‘원천 무효’라고 선언했다. 한국 측 서명자는 109명, 일본 측 서명자는 105명이었다. 이런 유의 선언에 참여한 일본 지식인들의 용기는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공동선언이 나오기까지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불법’이란 표현을 넣는 것이었다. 성명서에는 “병합조약 등은 원래 불의, 부당한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당초부터 ‘null and void(원천 무효)’였다고 하는 한국 측의 해석이 공통된 견해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라는 구절도 들어갔다. 한국병합이 ‘사실상 불법’이었음을 반성하는 내용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불법이라고 못 박지는 못했다. 당초 불법이란 표현을 넣으려고 했으나 일본 측 서명을 받기가 어려워졌다. 서명하기로 했다가 그 표현을 우려하며 빠진 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동선언의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그동안 일본 정부가 한국에 사과를 안 한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다양한 방식으로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런데 그것은 보상 차원의 조치였다. 보상과 배상은 다르다. 예컨대 정부가 신도시를 개발할 때 그 땅 원주민에게 제공하는 금전적 조치가 보상이다. 정부의 합법적 정책 추진 과정에 불가피하게 손해 본 사람에게 지급하는 것은 보상금이지 배상금이 아니다. 배상은 불법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일본의 정책 집행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진 일인가? 최근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 갈등도 이런 문제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해묵은 갈등인데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베 총리의 공격적 태도다.
 
일본의 전쟁 책임을 다룬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은 미흡했다. 배상 문제를 명확히 해놓지 않았다. 당시 동북아 정세가 요동치고 있었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되었고, 곧이어 1950년 북한의 불법 남침이 자행됐다. 남한마저 공산화될 위험에 처했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주도한 미국은 일본을 동북아 반공의 보루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일본의 전쟁책임을 묻는 것은 당면 과제에서 밀려났다. 패전국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까지 누리며 기사회생했다. 1965년 한·일 양국의 청구권협정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틀 내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도 ‘동북아 반공 벨트’의 일원으로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내며 남북 체제경쟁에서 승리했다. 1945년 이전엔 한국과 일본이 원수였지만, 광복 이후엔 미국 중심의 동북아 질서 속에서 손을 잡았다. 광복 이전과 이후의 동북아에서 전개된 역사적 차이와 현실에 대한 현명한 인식과 대처가 필요해 보인다. 식민지 침략을 거울삼아 일본의 야욕을 늘 경계해야 하지만 미국 중심의 동북아 안보 체제에서 미국과 동맹인 일본을 백안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일본의 식민지 침략까지 미화할 수는 없다.
 
한국 대법원의 2018년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은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 미진했던 문제를 피해자 차원에서 다시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 입장도 있지만 한국 입장도 있다. 입장 차이는 정치와 외교적 대화로 좁혀야 한다. 양국이 자기 입장만 과장해선 안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일본이 생떼로 고통받는 피해자 시늉을 하는 것은 봐주기 힘들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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