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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프리즘] 보수를 보수하라

중앙선데이 2019.07.20 00:21 645호 31면 지면보기
박신홍 정치에디터

박신홍 정치에디터

최근 저녁 모임에서 한 지인이 불쑥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보수주의자”란다. 중도 또는 진보에 가까웠던 그의 인생 역정이나 평소 발언에 비춰볼 때 의외다 싶었다. 그가 말을 이었다. “내가 떳떳하게 지지한다고 밝힐 수 있는 보수정당이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요즘 이런 생각을 종종 한다.” 젊어선 진보, 나이 들어선 보수에 관심이 가는 게 인지상정이라 했던가. 그의 ‘커밍아웃’에 일견 놀라면서도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 것은 진정 ‘보수다운 보수’를 바라는 세간의 민심을 피부로 느껴왔기 때문일 거다.
 

황교안 대표가 강조하는 ‘진정성’
책임 있는 행동으로 입증해 내야

보수는 역사의 주류라는 자신감을 공유한 집단이다. “진보가 역사를 바꿔왔다면 보수는 역사를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대표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와 자기희생이 늘 뒤따랐다. 세계대전 때 영국의 귀족들이 자진해서 전장에 나가 목숨 바쳐 싸운 것도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의 발로였다. 사회의 규율을 몸소 지키고 먼저 실천하는 이 같은 전통이야말로 보수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한국의 보수는 어떤가. 자유한국당은 보수의 가치와 책무를 충실히 따르고 있는가. “5·18 유공자 괴물” 발언으로 당원권이 정지됐던 김순례 의원은 3개월 징계가 끝난 19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최고위원으로 복귀했다. “5·18은 폭동”이라 했던 이종명 의원은 지난 2월 당 윤리위에서 제명 처분을 받았지만 지도부가 5개월 넘게 의원총회 추인을 미루면서 여전히 한국당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중도층마저 등돌린 잇단 망언에 자숙하고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긴커녕 “규정상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만 밝히고 있는 게 오늘날 제1 보수 야당의 현실이다.
 
자칭 보수 논객도 다를 게 없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세상이 바뀌어도 몇 번은 바뀌었는데 아직도 모든 현상을 보수·진보의 잣대로만 재단하고 철 지난 반공 이데올로기를 전가의 보도인 양 활용하기 일쑤다. 요즘 같은 초디지털 시대에 어느 누가 그런 고루한 언어와 훈계에 흔쾌히 공감하겠는가. 보수주의 창시자인 에드먼드 버크가 그토록 강조했던 ‘겸손하고 신중한 정치적 태도’는 어디로 갔는가. 과거 내로라하는 보수 논객들이 보여줬던 시대를 앞서가는 내공과 실력은 어디로 갔는가.
 
그러니 “좋은 직장에서 ‘보수’ 많이 받으며 자기만 편하게 살려는 사람이 한국의 보수주의자”라는 풍자가 SNS에서 회자되는 것 아니겠나. 그러니 “작금의 한국 보수주의는 ‘보수’할 것투성이”라는 뼈를 때리는 비판에 너도나도 ‘좋아요’를 누르는 것 아니겠나. 며칠 전 한 보수 정치인의 죽음에 보수는 물론 중도·진보 성향의 정치인과 시민들까지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황교안 한국당 대표는 지난달 취임 100일 인터뷰에서 ‘황 대표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진정성”이라고 답했다. “국민이 왜 정치인에게 실망하나. 현장에 와서 사진만 찍고 달라지는 게 없기 때문이다. 끝까지 챙기는 정치를 하겠다”면서다. 무엇이 진정성인가. 말로만 징계하고 5개월간 나 몰라라 하는 게 보수의 진정성인가. 보수정당이 능력과 신뢰를 증명해야 내년 총선 때, 더 나아가 2022년 대선 때 유권자들도 표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언제까지 존재감 없긴 마찬가지인 여당에 어부지리만 안겨주고 있을 건가.
 
야당이 강해져야 집권 여당도 긴장하고, 그래야 유권자의 선택지도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 이젠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하라”는 유권자들의 준엄한 요구에 황 대표와 한국당, 그리고 한국의 보수가 ‘진정성’을 담아 답할 차례다. 시간도, 기회도 얼마 남지 않았다.
 
박신홍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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