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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동물학 박사’ 이미륵 논문엔 광복 꿈꾼 애국혼 가득

중앙선데이 2019.07.20 00:20 645호 17면 지면보기
3·1운동, 임시정부 100주년 ⑧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오후, 안과학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는데 상규에게 붙들렸다. 상규는 나와 꽤 친한 아이였다.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일 저녁에 중대한 회의가 있으니 남운 식당으로 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러기로 약속하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상규에게서 초대받은 익원 역시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경성의전 다닐 때 3·1운동 참여
상해 임정 거쳐 독일 망명 ‘불꽃 삶’

재생력 강한 플라나리아 논문 쓰며
일제 식민지인 조국의 재생 꿈꿔

일제 고발한 소설 『압록강은…』
호평 속 독일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1919년 3·1운동 직전 어느 날 오후, 경성의학전문학교 안의 한 풍경이다. 이미륵의 자전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의 한 장면이다. ‘상규’와 ‘익원’은 경성의전 학생으로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이후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유상규와 허익원을 가리킨다.
  
독립운동가 재판 기록엔 ‘이의경’ 본명
 
독일 뮌헨 교외 그래펠핑시 ‘쿠르트 후버 거리’에 지난 5월 28일 세워진 이미륵 기념 동판. 이미륵이 우리말로 쓴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라는 문구와 친필 서명, 한옥 등을 새겨 넣었다.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독일 뮌헨 교외 그래펠핑시 ‘쿠르트 후버 거리’에 지난 5월 28일 세워진 이미륵 기념 동판. 이미륵이 우리말로 쓴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라는 문구와 친필 서명, 한옥 등을 새겨 넣었다. [사진 국외소재문화재재단]

경성의전은 당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음에도 이 학교의 적지 않은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했다. 파고다공원 만세운동의 학생 지도자 한위건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유려한 문체와 이미륵의 언뜻 유약해 보이는 이미지에 가려 그의 독립운동은 잘 부각되지 않는 면이 있다. 경성의전 초기 학생 명부와 독립운동가 재판 기록에 나오는 ‘이의경(李儀景)’이 그의 본명이다. 이미륵은 아명이었고 독일 망명 이후 필명으로 사용했다.
 
우리나라 ‘동물학 박사 1호’는 누구일까. 의외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바로 이미륵이다. 의사를 지망하던 경성의전 학생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거쳐 독일로 망명해 동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소설가로 활동하는 과정은 파란만장하다.
 
1931년 무렵 뮌헨에서의 이미륵. 1928년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작가로서의 삶을 준비하던 시기다. [사진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1931년 무렵 뮌헨에서의 이미륵. 1928년 동물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작가로서의 삶을 준비하던 시기다. [사진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그가 동물학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전·현직 회장인 정규화·박균이 쓴 『이미륵 평전』을 보면 그 배경이 일부 나온다. 이미륵은 독일에서도 당초 의학을 공부하려고 했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운데 학위 과정이 긴 의학 대신 동물학으로 전공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압록강은 흐른다』 속에는 해부학 수업 시간에 비인간적인 서양의학에 회의를 느끼는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박사학위 이후 동물학자로서의 삶이 아닌 작가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배경은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듯한데, 필자가 볼 때 동물학 전공과 작가로서의 삶이 전혀 다른 별개의 길만은 아닌 것 같다.
 
1928년 7월 뮌헨대학에 제출된 그의 박사학위논문 제목은 좀 길다. ‘비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플라나리아 재생에 나타나는 규칙적인 현상’이다. ‘플라나리아’와 ‘재생’이 논문의 키워드인데, 이는 단순히 동물학 논문으로만 보이지 않게 한다. 플라나리아의 재생에 대한 이미륵의 관심에서, 일제 식민지라는 비정상적인 조건에 놓여 있는 조국의 현실이 겹쳐져 연상되는 것이다. 재생이란 용어가 광복과 독립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플라나리아라는 생물의 특징도 주목된다. 플라나리아는 재생력이 매우 강한 생물로 알려져 있다. 어떤 형태로 잘려도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플라나리아는 또 기억을 잃지 않는 생물로도 알려져 있다. 뇌가 있는 머리 부분을 제거해도 기억을 잃지 않고 뇌를 재생해 낸다는 사실이 미국 터프츠대학 연구팀에 의해 밝혀졌다고 한다.
 
그래펠핑시에 있는 이미륵 박사 묘소. [사진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그래펠핑시에 있는 이미륵 박사 묘소. [사진 이미륵박사기념사업회]

“나는 한밤중까지 책에 매달렸다. 학교 공부는 전보다 훨씬 어려워졌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일본말을 배우게 됐고, 모든 교과서가 일본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역사도 다시 다르게 배워야만 했다. 합방이 되기 전 우리나라에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은 삭제되었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적인 역사가 인정되지 않았다. 다만 오래전부터 일본 제국에 조공을 바치는 힘없는 이웃 나라로 간주됐다.”
 
『압록강은 흐른다』의 한 대목인데,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바뀐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었다.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를 국어로 배우고, 일본이 왜곡한 역사를 우리 역사로 배우게 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동물학 연구를 통해 확인한 자연계 재생의 원리는 그가 소설을 쓰는 이유가 되었을 수 있다. 사라지는 조국의 기억을 소설을 통해 필사적으로 재현해 놓음으로써 궁극적으로 조국의 재생과 광복을 염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쿠르트 후버 거리에 이미륵 기념 동판
 
독일 양부모 자일러씨 내외와 함께한 이미륵(왼쪽·1934년).

독일 양부모 자일러씨 내외와 함께한 이미륵(왼쪽·1934년).

이미륵은 박사학위 준비에 바빴을 1927년 2월 5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회의에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이극로·김법린·허헌 등과 함께 참여했다. 한국대표단이 그때 발표한 ‘한국의 문제(The Korean Problem)’라는 독일어와 영어로 쓴 문건이 전해지는데, 이미륵의 뮌헨대학 동기동창인 안젤름 샬러 박사가 정규화 회장에게 전해주어 독립기념관에 기증됐다. 일제의 한국 침탈상을 폭로한 이 문서에서도 이미륵의 문제의식은 발견된다. 한국이 유사 이래 독립국이었으며 고유한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일제가 한국의 국권을 강탈한 후 그들의 범죄를 감추기 위해 한국인의 나쁜 관습과 일부 개개인들의 결점을 일반화하면서 모든 발전은 일본인의 덕택인 것처럼 선전한다고 비판했다. 한국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국제사회에 유포하며 침략을 정당화하는 일제의 속셈을 폭로하면서 잘못을 바로잡고 있다. 이 문서 표지의 ‘Mirok’ 서명을 통해 그의 체취를 느껴볼 수 있다.
 
1946년 출간된 『압록강은 흐른다』는 전쟁으로 피폐한 독일 사회의 정신적 재건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독일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이미륵의 삶과 그의 대표작은 70여년이 지난 오늘 다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일제의 침략상과 3·1운동의 실상, 그리고 사라져가는 우리 전통문화의 의미를 그의 책은 진솔하고도 아련하게 전해주고 있다. 나아가 한국과 독일의 문화를 잇는 다리 역할도 하고 있다.
 
『압록강은 흐른다』가 집필된 장소인 독일 뮌헨 교외 그래펠핑시에서 지난 5월 28일 의미 깊은 행사가 열렸다. 이미륵을 기리는 동판이 그래펠핑 시청 옆 ‘쿠르트 후버 거리’에 세워졌다. 쿠르트 후버는 나치에 저항하다 1943년 처형된 뮌헨대 교수다. 뮌헨대 학생들의 반나치 운동을 기록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원제 ‘백장미’)에 나오는 철학 교수로 유명하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에 이미륵 동판이 후버와 나란히 들어선 것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서 이미륵 동판을 제작해 장소를 물색하던 중 그래펠핑시가 후버 거리에 동판을 세우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미륵과 후버 교수가 뮌헨 대학 시절 나눴던 우정을 기리는 의미도 있다. 이미륵이 박사 논문을 쓸 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인물이기도 하다. 나치에 의해 후버 교수가 교수형당한 후 대부분 사람들이 기피하고 있을 때 이미륵이 가족과 함께 시신 수습을 도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미륵 약력
● 1899년 황해도 해주 출생
● 1919년 경성의학전문학교 3학년 재학 중 3·1운동 참여, ‘대한독립청년외교단’ 활동
일제의 검거를 피해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피신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봉근의 도움으로 독일 망명(1920)
● 1921년 뷔르츠부르크대, 하이델베르크대 등서 의학 공부(~1923)
● 1927년 독일 망명 중 김법린, 이극로, 황우일 등과 유럽지역 항일활동
● 1928년 뮌헨대 이학 박사학위 취득
● 1946년 자전적 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발표
● 1948년 뮌헨대 강사(~1950)
● 1950년 사망, 그래펠핑시 묘역 안장
뮌헨대서 한국사 강의 … 인생 절정서 위암 선고
이미륵의 행적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미륵은 3·1운동에 참여한 후 경성의전을 사실상 그만두고 본격 독립운동에 나섰다. 3·1운동 이후 국내에 결성된 ‘대한독립청년외교단’의 기관지 ‘외교시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대한독립청년외교단의 주요 활동은 ‘대한적십자회’를  통해 모은 독립자금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일이었다. 1919년 11월 일제 경찰에 발각돼 이미륵도 수배자 명단에 올랐다. 그는 상해로 망명해 잠시 임시정부에서 일하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과 독일 출신 빌헬름 선교사의 도움으로 독일에 도착했다. 망명 후인 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 궐석재판에서 그는 2년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1946년 『압록강은 흐른다』의 출간과 성공으로 바빠진 그는 1948년부터 뮌헨대 동양학부 강의를 맡으면서 더욱 바빠지게 됐다. 첫 개설 과목은 ‘한국의 언어와 역사’ ‘맹자’ ‘동아시아 문학사’였다. 인생의 절정이라고 할 수도 있던 이때 그는 위암 선고를 받았고, 끝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한국어 문법과 맹자, 공자 강의 노트가 전하고 있는데, 그는 맹자를 특히 좋아했던 것 같다. 독일의 지인에게 친필로 적어준 맹자의 격언이 전하고 있다. “사람의 문제는 남의 스승 되기를 좋아하는 데 있다.” 독일 ‘후버 거리’에 놓인 동판에는 이미륵이 우리말로 쓴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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