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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폭우 속 보름간 350㎞ 완주…‘나’를 찾고 ‘우리’를 만난다

중앙선데이 2019.07.20 00:20 645호 25면 지면보기
[스포츠 오디세이] 대학생 국토대장정 ‘젊음은 왜 걷는가’
DMZ 평화통일대장정에 나선 남녀 대원들. [사진 엄홍길 휴먼재단]

DMZ 평화통일대장정에 나선 남녀 대원들. [사진 엄홍길 휴먼재단]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계속 걸어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체력 테스트 거친 학생 90명 참여
걷고 뛰다 탈진 땐 동료 배낭 메줘
10분간 샤워, 여학생들 바로 적응

임진각 골인 지점에선 눈물바다
“고통 함께 견뎌내며 커플도 생겨”
주최 측 “도전·성취의 장 제공 역할”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배우’ 하정우가 자신의 책 『걷는 사람, 하정우』(문학동네)에 쓴 글이다. 2011년 방송에서 얼떨결에 한 공약 때문에 그는 서울에서 해남까지 577㎞를 걷는 국토대장정을 하게 됐고, 그 후 ‘걷기도(道) 교주’가 됐다.
 
여름의 한복판을 걸어서 관통하는 젊은 무리가 있다. 불볕도, 폭우도, 물집도 이들을 멈추지 못한다. 이들은 스스로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의식(儀式)을 거치며 ‘나’를 찾고 ‘우리’를 발견한다.
 
22회째 동아제약 국토대장정이 원조
 
출발 전 대원들을 격려하는 엄홍길 대장. [사진 엄홍길 휴먼재단]

출발 전 대원들을 격려하는 엄홍길 대장. [사진 엄홍길 휴먼재단]

‘엄홍길 대장과 함께하는 제7회 DMZ 평화통일대장정’ 발대식이 지난 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엄홍길휴먼재단(이사장 이재후)에서 기획한 이 행사는 대학생들이 분단의 상징인 휴전선을 따라 걸으며 평화통일을 염원하고 도전 정신을 키우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히말라야 8000m급 16좌를 완등한 엄 대장이 대원들을 이끈다. 올해 대장정은 엄홍길휴먼재단과 코리아중앙데일리(Korea JoongAng Daily)가 공동 주최했다.
 
발대식을 마친 대원들은 버스로 강원도 고성으로 이동, 다음날부터 장정을 시작했다. 고성에서 인제∼양구∼화천을 거쳐 경기도 연천∼파주를 지나 임진각 평화누리공원에 도착하는 14박 15일 350㎞ 일정이다.
 
올해는 220명의 대학생이 지원했고, 체력 테스트와 면접을 거쳐 90명(남 56, 여 34)을 선발했다. 낙오해서 구급차를 탈 수는 있으나 3회 승차 시 자동 탈락이고, 숙소에서 음주·흡연 등 금지행위를 한 대원도 퇴소 조치된다. 사흘째 한 여성 대원이 발목 부상으로 기권했고, 남학생 한 명은 흡연이 적발돼 퇴소했다.
 
행군 중 환하게 웃는 대원들. [사진 엄홍길 휴먼재단]

행군 중 환하게 웃는 대원들. [사진 엄홍길 휴먼재단]

대장정 8일째인 지난 14일 강원도 양구∼화천 평화의댐 구간을 대원들과 함께 걸었다. 도전·열정·평화·통일 팀으로 나뉜 대원들은 조별로 구호를 외치며 전진했다.
 
말이 걷기지 앞쪽은 속보, 뒤쪽은 구보 수준이었다. 앞뒤 간격이 조금만 벌어져도 진행 요원이 “앞으로 밀착”을 외쳤고, 대원들은 종종걸음을 치며 대열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오르막 때 엄 대장은 속도를 더 올리는 것 같았다. 대원들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몇몇 여자 대원들이 처지기 시작했다. 남학생들은 지친 여학생의 배낭(약 8kg)을 대신 메거나 뒤에서 밀어줬다. 탈진한 대원은 구급차를 탔고, 견딜 만한 사람은 ‘7번방’에서 계속 걸었다. 대열 후미에 있는 7번방(방장 김범기 엄홍길휴먼재단 이사)은 재단 이사들과 의료진, 자원봉사자로 이뤄진 팀으로 처진 대원들과 함께 걸으며 힘을 넣어준다.
 
양구에서 화천으로 넘어가는 깔딱고개가 이날의 고비였다. 대원들은 “할 수 있다” “힘을 내라 힘을 내”라고 격려하며 고갯길을 올라섰다. 오천터널을 지나자 내리막이 길게 이어졌고, 끊임없이 노랫소리가 퍼졌다. 반대쪽에서 힘겹게 사이클 페달을 밟으며 올라오는 라이더가 보였다. 누군가 “힘을 내라 힘을 내” 소리쳐 웃음이 터졌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장기자랑 시간에 열창하는 대원. [사진 엄홍길 휴먼재단]

장기자랑 시간에 열창하는 대원. [사진 엄홍길 휴먼재단]

드디어 목적지 평화의댐에 도착했다. 대원들은 평화의댐 광장에 텐트를 쳤고 물 문화관 샤워실에서 몸을 씻고 땀에 젖은 옷을 빨았다. 1인당 샤워 시간 10분은 여자들에겐 턱없이 짧다. 여학생대장 이수민씨는 “여학생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게 씻는 거죠. 투덜거리던 친구들이 하루만 지나면 ‘씻을 수 있다는 데 감사하자’로 바뀝니다”며 웃었다.
 
다음날은 꿀맛 같은 휴식일. 대원들은 밀린 빨래를 해서 말리고, 물집과 상처로 엉망이 된 발을 치료했다. 남학생대표 박찬원씨는 “작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면서 걷는 기쁨을 알게 됐어요. 힘들지만 그날그날 숙소에 도착할 때 희열이 있거든요. 가만 있으면 같은 것만 보게 되지만 걸으면 다른 걸 보고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물집왕 선발대회’등 다양한 이벤트도
 
물집왕 선발대회에 나선 여학생. [사진 동아제약]

물집왕 선발대회에 나선 여학생. [사진 동아제약]

이수민씨는 “너무 힘들어 하면 남자 동료가 배낭을 달라고 하는데 그게 너무 미안하고 마음이 힘들어요. 그 친구는 ‘미안해 하지 말고 주려면 일찍 줘라. 네가 낙오하면 그게 우린 더 힘들다. 다 함께 완주하기로 했잖아’ 그래요. ‘아, 이게 팀이라는 거구나’ 느꼈죠”라고 말했다.
 
행정요원 손혜원씨는 대장정 5기 출신이다. 2년 전 대장정에서 남자친구를 만났다는 손씨는 “함께 극한의 고통을 견뎌낸 게 서로를 끈끈하게 엮어주는 것 같아요. 당시 여섯 커플이 나왔는데 아직 헤어진 팀이 없어요. 언젠가 ‘대장정 베이비’도 나오겠죠”라며 웃었다.
 
인터뷰 장면을 열심히 찍는 여학생이 있었다. 모든 일정을 영상에 담아 유튜브에 올리는 김수빈씨다. 자그마한 체구에 카메라를 들고 행군 대열의 앞뒤를 뛰어다니는 영화과 학생이다. 김씨는 “시나리오를 만들려면 독특한 캐릭터가 필요해요. 이 불볕더위에 보름간 국토대장정을 하다니 참 희한한 사람들이라 생각해서 찍으려고 왔죠”라고 했다. 그는 “이런 데 오면 큰일 난다고 친구들한테 말할 겁니다. 빡센 분위기, 군대문화 같은 게 누군가에겐 아름답지 못한 기억일 수 있죠. 그래서 안 좋았냐고요? 아니요. 새로운 세계를 많이 봤죠”라고 말했다.
 
박지혁씨는 한 달 전까지 군인이었다. 전역하고 곧바로 대장정을 신청했다. 그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기, 책 읽고 일기 쓰기 같이 군에서 익힌 좋은 습관이 전역하면 흐지부지될까 봐 두려웠어요. 여기는 군대에서 사회로 나가는 훈련소라고 생각했습니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만나 펑펑 우는 대원. [사진 동아제약]

아버지를 만나 펑펑 우는 대원. [사진 동아제약]

오후에는 평화통일 콘서트가 열렸다. 조별로 준비한 장기자랑 무대는 상금과 자존심이 걸려 있어서 불꽃이 튀었다. 아픈 다리를 끌고, 하루뿐인 시간을 쪼개 준비한 노래와 댄스에는 끼와 힘이 넘쳤다.
 
‘국토 걷기’의 원조는 동아제약(박카스) 대학생 국토대장정이다. 1998년 시작해 22회를 맞은 박카스 대장정은 경쟁률이 100대1에 육박할 정도다. 남녀 72명씩 144명이 20박 21일간 매년 다른 루트를 걷는다. 올해는 경북 포항을 출발해 동해안을 따라 북상, 강원도 고성까지 573㎞를 걸은 뒤 지난 18일 완주식을 했다.
 
박카스는 일정 중간에 부모님을 초청해 함께 걷고 저녁을 먹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저명인사 초청 특강, 물집왕 선발대회 등 이벤트를 벌이고, 통과 지역 문화유산 탐방 등도 곁들인다. 7년째 대장정을 총괄하는 동아제약 김경태 부장은 “그동안 국토대장정의 방향이 도전·극복에 집중됐다면 이젠 ‘공동체’를 생각해야 할 때다. 대장정의 본질적 가치를 지키면서 트렌드와 젊은이의 감성을 접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DMZ 평화통일대장정을 지휘하고 있는 박광재 운영본부장도 “우리도 전체 일정과 프로그램의 변화를 고민하고 있다. 하지만 젊은이들에게 도전과 성취의 장을 제공하는 역할만큼은 지켜가겠다”고 다짐했다.
 
DMZ 평화통일대장정의 완주식은 20일 오후 파주 임진각에서 열린다. 눈물바다가 된다는 골인 지점에서도 유튜버 김수빈씨는 “이런 데 절대 오면 안 된다”고 친구들에게 말할까.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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