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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의 퍼스펙티브] 워싱턴 로비에서 한국은 일본의 상대가 안 된다

중앙일보 2019.07.18 00:02 종합 26면 지면보기
미국이 한·일 갈등 중재 꺼리는 이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가 2015년 4월 사사카와평화재단(SPF) 미국 지부가 주최한 연례 포럼에 참석해 데니스 블레어 SPF 미국 지부 이사장과 대담하고 있다. [사진 SPF 미국 지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가 2015년 4월 사사카와평화재단(SPF) 미국 지부가 주최한 연례 포럼에 참석해 데니스 블레어 SPF 미국 지부 이사장과 대담하고 있다. [사진 SPF 미국 지부]

위안부 합의 파기→대법원의 강제 징용노동자 배상 판결→일본 해군 초계기에 대한 한국 해군의 조사(照射) 논란으로 확전 순서를 밟아 온 한·일 관계는 일본의 대한 수출 규제라는 벼랑 끝에 섰다. 안보 우호국에 수출 심사를 면제하는 화이트 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시한인 18일이나 일본 참의원 선거일인 21일도 사태를 진정 국면으로 돌리는 변곡점이 되지 못한 채 지나간다.
 

대미 로비의 본산 사사카와재단
연 6000억 쓰며 친일 인사 양성
미 싱크탱크들에도 각종 지원으로
일본에 유리한 여론 조성에 앞장

한국 정부는 일본의 강공이 참의원 선거용이라는 안일한 인식에 사로잡혀, 아베 신조 총리의 동북아 경제·안보 구도의 재편 야망을 보지 못했다. 당연히 전략적 대응책을 준비하지 못했다. 지금 아베는 한국을 도발할 메뉴를 잇달아 개발하여 한국인의 감정적 반작용을 불러 보수·우익을 중심으로 여론을 아베 지지로 결속시키고 있다.
 
일본의 극우 매체 산케이신문은 한국이 미국에 중재 좀 해달라고 매달리고 있다고 조롱하는 사설을 썼다. 산케이의 사설이 아니라도 한국은 미국에 아베 정부의 폭주를 견제해 달라고 로비를 벌이고 있다. 그러나 미국 관리들을 만나 중재를 요청하는 것은 외교이지 로비가 아니다. 미국 관리들은 공개적으로는 두 나라가 대화로 해결하라는 원론적 립 서비스만 하고, 사적으로는 한국이 미국으로 오지 말고 일본으로 가라고 말한다. 대미 로비에서는 한국이 일본을 당할 수가 없는 것이 유감스러운 현실이다.
 
일본의 대미 로비의 역사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정부(1901년 9월~1909년 3월)에서 시작된다. 일본의 로비로 친일이 된 루스벨트는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으로 러·일 전쟁의 종전을 주선하고 같은 해 일본의 한국 지배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교환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다.
 
그에 앞서 미국의 초대 주일 공사 타운센드 해리스는 일본의 미인계에 넘어가 미 국무부로부터 “당신은 미국 공사냐 일본 공사냐”는 경고를 받았다. 그때 이후 형성되어 온 미국 내 일본 로비망과 저팬 스쿨은 지금 한·일 갈등에서 제철을 만났다. 한국이 대미 로비에서 마주칠 거대한 벽은 사사카와평화재단(SPF)이다. SPF의 인맥과 자금력에 비하면 한국 로비력은 제로에 가깝다. 그래서 한국은 명분을 세일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다. 아베는 트럼프 못지않게 국제 무역 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과 국제사회에 널리 인식시켜 아베가 스스로 부메랑을 걱정하게 하여야 한다.
 
사사카와 료이치 SPF 이사장(왼쪽)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SPF는 2000년 아프리카 영농 개선 사업을 벌인 지미카터재단을 후원했다. [중앙포토]

사사카와 료이치 SPF 이사장(왼쪽)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SPF는 2000년 아프리카 영농 개선 사업을 벌인 지미카터재단을 후원했다. [중앙포토]

SPF의 창설자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는 트럼프 이상의 괴짜 정치인이자 사업가이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사사카와는 A급 전범자 명단에 못 오를까 봐 초조했다고 한다. 그는 만주사변이 일어나 만주 괴뢰 정부가 서자 만주로 달려가 만주국 황제 푸이(溥儀)를 만나 국내에서 지명도를 높였다. 무솔리니를 숭배한 사사카와는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四五六)가 제공한 군용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날아가 일본 전통 의상 하오리 하카마를 입고 무솔리니와 면담했다. 마이니치신문의 대서특필로 사사카와는 일약 영웅이 되었다.
 
그는 도조 내각의 태평양전쟁에는 부정적이었지만, 정면 반대는 자제하고 주식 투자, 군수품 납품, 국제 아편 거래로 일본 “정·재계의 흑막”, “가장 돈이 많은 파시스트”가 되었다.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그는 항공학교를 거쳐 조종사 훈련을 받고 공군에 입대했다. 그런 인연으로 그는 비행기와 비행장을 군에 헌납했다. 1942년에는 풍부한 정치 자금을 살포하여 중의원 의원에 당선됐다. 전쟁 중 그의 활동은 A급 전범에 지정되기에 부족해 보였다. 그는 점령군 사령부를 상대로 로비했다. 맥아더 사령부는 그를 초국가주의적·폭력적 결사 및 애국적 비밀 결사의 주요 인물로 체포하여 스가모 형무소 수감을 명했다.
 
사사카와가 스가모 형무소 입소를 명령받은 전날 도쿄 거리에서는 진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사사카와는 수감 예정 하루 전 군칸 마치(군함 행진곡)을 연주하는 브라스 밴드를 앞세우고 뒤에는 환호하는 지지자들을 태운 트럭을 거느리고 스가모 형무소까지 행진했다. 그는 공직 추방 조치는 받았지만, 미국 점령 정책에 협력하는 전범은 활용한다는 미국의 점령 정책의 전환으로 도쿄재판에도 회부되지 않고 석방되었다. 사사카와는 스가모에서 후일 총리가 되는 아베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를 포함한 저명인사들과 친분을 맺었다. 그가 스가모는 “내 인생 최고의 대학”이라고 말한 것도 과장이 아니다.
 
사사카와의 수단 방법 안 가리는 의회 로비로 51년 보트 레이스 도박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중의원에서 통과시켰다. 사사카와는 일본선박진흥회를 설립하여 전후 실의에 빠진 일본인들이 열광한 보트 레이스 도박 사업 등으로 연간 수조 원의 수입을 올렸다. 그는 62년 인도주의적 자선사업을 명목으로 일본재단을 설립하여 학자들과 일본에 유학 오는 외국 학생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많은 한국 유학생이 일본재단의 돈을 받았다. 지원을 거절한 한 학자에 따르면 지원액은 30만~50만 엔 수준이었다. 60~70년대에는 큰돈이었다.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 특보는 그런 학자와 관리들을 ‘국화파’라고 부른다. 국화는 일본 천황의 상징이다. 사사카와는 86년 일본재단의 대외 조직으로 미국에 사사카와평화재단을 세웠다. 연 5억 달러의 예산을 쓴다. 학자 교류, 대학원생 지원, 교육 프로그램 지원을 목적으로 내세웠다. SPF는 일본의 대미 로비 본산이다. SPF는 태평양사령관을 지내고 오바마 정부 때 국가정보장관(DNI)을 역임한 데니스 블레어를 이사장으로 영입했다. 블레어는 63세에 일본어를 배우는 열성을 보였다.
 
SPF는 수많은 미국의 싱크탱크 프로젝트·세미나·강연·포럼을 활발하게 지원하여 많은 미국판 ‘국화파’를 배출했다. 최근 보수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부소장 마이클 그린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지금의 한·일 갈등의 원인 제공자는 한국이라는 것이 미국 전문가들의 생각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전문가 그룹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정부 예산 지원으로 운영된 한미연구소(USKI) 하나 유지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70년대 유신 시절 박정희 정부는 하버드대를 비롯한 미국 명문대에 최고 100만 달러에서 최소 20만 달러를 헌금했다. 유신을 비판하는 학자들을 회유할 목적이었다. 그러나 하버드대에서 “우리가 이런 돈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시비가 일어 유신정권이 기대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정책의 결과를 로비로 바로잡을 수는 없다. 로비력도 일본의 상대가 안 된다. 대미 로비로 미국의 힘을 빌릴 생각을 접어야 하는 이유다.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생존 위안부 희생자들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일본 정부가 출연하는 100억원으로 위안부 생계 지원 기금을 만드는 선에서 일본과 “불가역적인” 합의에 서명했다. 이명박 정부때인 2011년 헌법재판소가 위안부 청구권 분쟁 해결 노력을 하지 않는 정부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걸 의식한 조치였다. 이듬해부터 대법원에서도 잇단 위헌 결정이 나왔다.징용 피해자 문제도 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종결된 것으로 합의하고 특별 입법으로 사망자 유족과 부상자에 피해 보상을 지급했다.
 
그러나 이것도 2012년 대법원이 외교협정으로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려 문제를 원점으로 돌렸다. 주심 김능환 대법관이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는 데 문제가 있다. 판사가 판결문을 차가운 머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으로 쓴 결과를 외교적으로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일본은 스스로 자유무역 질서를 교란하는 난폭자의 이미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우리는 양면 작전을 써야 한다. 한편으로는 치밀한 전략과 논리를 개발하여 국제사회에 호소한다. 공식적으로는 이낙연 총리를 특사로 파견하는 등 외교적 대화를 계속하면서, 비공식적으로는 일본 정계와 재계·언론·학계에 인맥을 가진 일본 전문가들을 총출동시켜 이성적 대화를 통한 갈등 해소를 설득해야 한다.
 
김영희 중앙일보 명예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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