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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호 칼럼] “한국은 일본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중앙일보 2019.07.17 00:15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한국 실무단을 홀대하는 일본을 보며 22년 전 쓰라린 기억이 떠올랐다. 외환위기 당시 필자는 도쿄 특파원으로 “일본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던 김영삼 정권의 후폭풍을 현지에서 목도했다. 1997년 11월 28일 한국의 부총리가 일본 대장상을 만나 긴급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싸늘히 거절당했다. 미국 재무부가 이미 대장성에 “돈을 빌려주지 말라”고 손을 써놓은 상태였다. 대장상은 “일본의 단독 지원은 어렵다”는 말만 반복했다. 지난 주말 일본의 홀대도 미국과의 사전 교감이나 최소한 묵인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칼자루 쥔 일본, 칼날 잡은 한국
협상을 두려워할 때 아니다
진보도 촉구하는 중재위 구성
새 기금 협상안 물밑 제시해야

문 대통령이 아베 총리가 쳐놓은 덫에 빠진 느낌이다. 일본은 정확히 급소를 찌른 반면 우리는 허둥대며 마구 주먹질만 해대고 있다. 그제 문 대통령의 “결국 일본 경제가 더 큰 피해를 볼 것”이란 발언도 사전에 계산된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동안 한국의 피해가 3배 이상이라는 분석과 너무 딴판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제대로 경제 피해를 따져보았는지도 의문이다. 민간 경제연구소들에 따르면 지난 주말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위에서 내려온 급한 지시”라며 일본 무역 규제에 관한 자료가 있으면 협조해 달라고 허겁지겁 요청해 왔다고 한다. 아무리 KDI라 해도 2~3일 만에 분석을 마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최근 일본 전문가들 인터뷰 중에서 두 가지 대목이 섬찟하게 다가온다. 하나는 “이번 사태의 교훈은 한국 사회가 일본을 놀라울 정도로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라는 박정진 일본 쓰다주쿠대 교수의 지적이다. 일본에서 혐한 분위기가 들끓고 아베 정부가 대놓고 칼을 갈고 있는데도 우리는 사전 경계와 예방에 실패했다. 또 하나는 “아베 정부는 도쿄 올림픽이 열리는 내년 7월쯤에야 타협에 나설 것”이라는 마쓰야마대 장정욱 교수의 진단이다. 오는 10월 소비세율 인상을 앞둔 아베로선 희생양이 필요하다. 중국과의 센카쿠 분쟁이나 러시아의 북방 영토 반환은 들쑤시기 어렵고  ‘무조건 만나겠다’고 한 북한을 계속 때릴 수도 없다. 남은 게 한국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는 오래 끌수록 좋을 게 없다. 의외로 이번 갈등의 해법을 놓고 보수·진보 진영 간의 차이도 크지 않다. 오히려 진보 쪽 의견이 합리적이다. 모두 외교적 해법을 주문한다. 한겨레신문은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해도 수년이 걸려 우리 기업의 어려움을 당장 풀기 어렵고, 승소한다 해도 보복 철회나 피해 원상회복을 이끌어내기 쉽지 않다”고 보도했다. 친정부인 정태인씨도 경향신문에 “양국의 최종심급이 65년 한일협정을 상반되게 해석했다. 일본 정부가 이 협정에 근거해 중재를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국 정부는 이 요구에 응해서 우리 대법원의 판단 근거를 설명하고 일본 자회사의 자산 압류의 문제도 논의했어야 했다. 그저 외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었다”고 썼다.
 
민변의 송기호 변호사 역시 민주당 간담회에서 “외교적 노력을 끝까지 다하고 그래도 안 되면 국제 중재위에 회부하는 게 오히려 국가의 책무”라고 인정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우리 정부가 개인 청구권 배상금을 선(先)지급하고 그 뒤에 국제 중재 절차에 따라 보상금 문제를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처럼 진보 쪽 전문가들도 입을 모아 중재위 구성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마감시한인 내일, 청와대에서 여야대표 회담이 열리는 만큼 승부수를 던질 마지막 기회다. 미국도 중재위 카드 정도는 나와야 한·일 중재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2010년의 중·일 분쟁은 반면교사다. 일본은 9월 7일 센카쿠 영해를 침범해 해상보안청 순시선과 충돌한 중국인 선장을 체포했다. 중국은 조용히 희토류 수출 금지 카드를 꺼내들었다. 뉴욕타임스가 9월 23일 익명의 당국자를 인용해 중국이 대일 희토류 수출을 전면 통제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양국 정부는 공개적으로 이 보도를 부인했지만 하루 뒤 일본은 중국 선장을 석방했다. 일본 나하 지방검찰청은 “이번 충돌은 선장이 순간적으로 취한 행동이고 계획성이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며 물러섰다. 이 백기 투항으로 일본 정부의 지지율은 10%포인트나 폭락했다. 하지만 그런 외교적 굴욕을 딛고 일본은 희토류 대체재를 개발해 냈고 중국도 더 이상 일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이번에도 사고는 정치인들이 치고 애먼 기업들이 수습하느라 사방으로 뛰어다니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으로 자영업을 망쳐놓았다면 이제 한·일 마찰로 수출기업들까지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다. 누가 칼자루를 쥐고 누가 칼날을 잡고 있는지부터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먼저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아픔을 위로하며 사태 악화를 막기 위해 ‘현금화(일본 자산 강제 매각)’를 늦춰달라고 부탁하는 게 합리적인 해결 수순이 아닐까 싶다. 동시에 특사를 보내 아베 총리와 중재위 구성이나 ‘1+1+α’ 등 공동기금 물밑 협상에 나서야 할 것이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도 취임연설에서 소련을 향해 “결코 두려워서 협상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협상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겠다”고 했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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