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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십을 즐기는 가벼운 혀, 그 쓴맛을 느낄 수 있다면

중앙일보 2019.07.16 05:00
[폴인을 읽다] 가벼운 혀끝이 자아내는 쓴맛을 느낀다는 것
내 입맛은 자극적인 것을 찾아다닌다. 매운 음식과 술을 찾아다닐 뿐 아니라 가십거리를 찾아다니는 혀끝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그런 나의 입맛을 알아채지 못한 채 지나가는 순간들이다. 친구 집에서 느긋하게 아침을 누리던 날이었다. 친구가 틀어놓은 노래를 듣다, 불현듯 그 노래의 주인에 대한 소문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아주 가볍게 그 소문은 머리에서 입을 통해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걸 왜 말하는데?”
 
따끔한 친구의 물음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거창하게 읊어대던 나의 신념을 묵묵히 듣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아득하고 창피했다. 나의 혀끝이 가벼운 것을 느끼고 마는 순간, 어렵게 하나씩 깨달아간 신념마저 누구를 위한 것인지, 그를 지킬 수 있는지가 아득해진다. 그리고 남들보다 조금 더 먼저 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알량한 그 마음이 스스로를 이렇게 못나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눈물나도록 창피하다. 그렇게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나의 혀끝은 끝끝내 쓴맛을 느끼고 만다.
 
넷플릭스 시즌 1의 ‘국가’(The National Anthem)는 어떠한 비평도 쉽사리 할 수 없게 만든다. 그 비평의 칼날은 결국 자신을 향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에피소드일 것이다. ‘국가’는 공주를 납치한 테러리스트 한 명이 영국을 충격으로 물들이는 작품이다. “총리가 돼지와 수간(獸姦)하지 않으면, 공주는 죽는다”는 테러범의 황당한 협박 이후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다.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미러>의 '국가' 편에서 테러범은 "총리가 돼지와 수간하지 않으면 납치한 공주를 죽이겠다"고 말한다. [사진 폴인]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미러>의 '국가' 편에서 테러범은 "총리가 돼지와 수간하지 않으면 납치한 공주를 죽이겠다"고 말한다. [사진 폴인]

 
폴인(fol:in) 스토리북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미러’로 철학하기>에서 이원진 박사는 ‘국가 편’을 거울삼아 현재를 비춘다. 주목할 장면은 월드컵 중계를 보듯 TV 앞에 모여,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대중의 모습이다. 테러범의 협박 이후, 영국 정부는 갖은 수를 쓴다. 그러나 컴퓨터 그래픽으로 돼지와의 수간 장면을 위조하려는 시도가 들통나자, 분노한 테러범은 공주의 손가락을 절단하는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다. 테러범의 요구를 들어주면 안 된다던 여론은 점점 총리를 몰아세우기 시작한다. 결국 총리는 약속된 시간에 참담한 심정으로 돼지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최고 권력자의 수치스러운 60분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다. 테러범을 찾기 위해서 왕실 혹은 정부에 적대적인 인물을 물색했지만 결국 총리를 돼지 앞에 세운 것은 대중이다. 한 개인의 존엄이 걸린 상황이지만, 사람들은 TV 앞에서 신나는 광경을 기다리듯이 건배하며 낄낄댄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중 뜨끔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눈과 귀, 모든 감각을 빼앗는 사건이 나타났을 때 나만은 다를 수 있을까. 모든 감각을 빼앗기는 이러한 현상을 프랑스 철학자 기 드보르(1931~1994)는 ‘스펙타클’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굉장히 멋진 광경’이란 뜻의 ‘스펙타클(spectacle)’을 부정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장본인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직접 겪은 사람으로서 음모나 선동 이론이 시각적인 유혹을 통해 더욱 강해지는 현상을 비판하고자 했다. ‘스펙타클의 시간’에 갇힌 총리와 관저, 국민은 최면에 빠지고 언론은 같은 뉴스만을 계속 확대 재생산한다. 이 모든 상황을 다 보고 있던 테러범은 약속된 시간 30분 전에 공주를 풀어준다. 그러나 총리의 수간을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은 길거리에 쓰러진 공주를 아무도 보지 못한다. ‘스펙타클의 시간’에 갇힌 동안 아무도 ‘리얼타임’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폴인(fol:in)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스토리북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의 표지. [사진 폴인]

폴인(fol:in) 웹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스토리북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의 표지. [사진 폴인]

 
폴인 스토리북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미러’로 철학하기>에서 이원진 박사의 시각이 특별한 이유는, 인간의 일그러진 우월성이 교차하는 지점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번 에피소드는 소수가 다수를 감시하는 판옵티콘의 대응 개념인 다수가 소수의 권력자를 감시하는 시놉티콘마저도 뒤집는다. 다수의 대중이 소수의 권력자를 감시하고 있다고 믿는 순간, 테러범은 그것 역시 허상일 수 있다는 점을 꼬집는다. 그리고 그는 시놉티콘도 대안이 아닐 수 있다는 고도의 문화 비평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특정 정치인을 비판하고 감시하면서 이성적 주체로서의 개인으로 존재한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 또한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새 사건은 대중의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공주는 이미 풀려났지만 아무도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사진 넷플릭스]

어느새 사건은 대중의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공주는 이미 풀려났지만 아무도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 [사진 넷플릭스]

 
총리의 시선, 군중의 시선, 테러범의 시선이 교차하면서 서로가 자기의 시선이 우월하다고 뽐내다가 모두 충격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돼지 수간’이라는 사건은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동물성에 대한 혐오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원진 박사는 이 작품의 제목이 ‘국가(國歌)’인 것은 애국가가 울릴 때 사람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국기에 경례를 하는, 결집의 역할을 스펙타클이 대체하고 있는 현대사회를 담고 있다고 본다. 스펙타클한 시간이 갖는 몰입력을 국가에 빗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찾는 이들은 있다. 우리가 ‘스펙타클의 시간’을 의식한다면 벗어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선동되거나 휘둘리지 않고 미디어를 이용하는 능력,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를 키우는 것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그는 덧붙인다.
 
혀끝의 가벼움으로 인한 쓴맛을 느끼는 순간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무엇이 올바른지 안다면, 무엇이 우리의 삶을 보다 낫게 만드는지를 안다면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나’를 그리고 ‘내 주변’을, 나아가 ‘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기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심코 지나갔던 가볍고도 쓴, 오늘의 순간을 곱씹어본다.
 
김아현 객원에디터 folin@foli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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