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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징용 판결 지연’ 잘한 일이라고?

중앙일보 2019.07.16 00:12 종합 30면 지면보기
권석천 논설위원

권석천 논설위원

“강제징용 사건 검토 보고서를 그대로 전달하는 게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그런 영향이 있을 것 같아 주저됐습니다.”
 

판사들의 양심은 얼룩져야 했고
외교부는 책임 회피에 급급했고
원고 9명 중 8명이 세상을 떠났다

지난주 수요일(10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법정.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첫 증인으로 박찬익 변호사가 나왔다. 그는 2012~2014년 법원행정처 심의관으로 강제징용 재판 지연 시나리오 등을 검토했다.  
 
이날 재판에서 검찰은 박찬익에게 물었다. “2013년 12월 당시 임종헌 기조실장이 ‘검토 문건을 대법관 재판연구관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을 때, 증인은 왜 ‘보내도 되느냐’고 머뭇거렸습니까?” 박찬익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답했다. 그는 고민 끝에 문건에서 재판 진행 속도를 검토한 대목을 삭제하고 보냈다고 했다.
 
양심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싶었던 걸까. 박찬익은 지시에 따르면서도 계속해서 소극적 저항의 흔적을 남겼다. 지난 5월 23일 임종헌 재판에 출석한 조인영 전 기획조정심의관도 다르지 않았다.  
 
조인영은 2016년 1월 ‘위안부 손해배상판결 관련 보고’를 작성했다. 문건은 ‘일본군 위안부 동원은 반인권적 범죄’라는 점을 강조했으나 ‘개인청구권은 소멸하였다고 판시함이 상당함’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불일치는 “피고인(임종헌)과 다른 개인적 견해를 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울먹이며 말했다.
 
“이 사건이 아직도 재판 진행 중인데, 이런 것 때문에 재판에 부담되거나 방해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분들이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정말 받으셨으면….”  
 
일본 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부품에 대한 수출 규제 카드를 꺼내 들었다. 눈앞의 우려 때문일까. 강제징용 사건이 5년 넘게(2013년~2018년) 대법원에 묶여 있었던 게 갑자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외교적·정책적 방법으로 문제 해결할 시간을 벌어 준 측면이 없지 않다”는 글이 부장판사 블로그에 오르고, “박근혜 정부에서 지금 같은 사태를 우려해 판결을 지연하려 했다”는 말이 일간지에 실린다.
 
이렇듯 재평가받는 ‘판결 지연’은 박찬익·조인영 같은 판사들의 양심을 강제 동원하는 위헌적 행태로 점철된 것이었다. 그뿐인가. 청와대는 비서실장 공관의 장관들 회의에 현직 대법관인 법원행정처장을 앉혀놓고 ‘판결 재검토’ ‘재판 지연’을 주문했다. 민사소송인 강제징용 손해배상 재판에 느닷없이 국가기관(외교부)에 “절차적 만족감”을 주는 ‘참고인 의견서 제출’ 제도가 도입됐다.
 
막상 제도가 만들어지자 외교부는 여론 눈치만 살피며 의견서 제출을 미뤘다. 의견서에 ‘귀원(※대법원)의 요청에 따라’ 문구를 넣느냐, 마느냐를 놓고 법원행정처와 실랑이했다. 당시 윤병세 장관 주재 회의에 참석한 외교부 과장 업무일지엔 이런 장관 말씀이 적혔다. ‘대법원이 우리 꺼(※의견서) 받아먹고 판결 안 나오는’.
 
행정처 판사들이 양심의 알리바이를 만드는 사이 박근혜 정부 당국자들은 책임의 알리바이를 만들고 있었다. 일본 정부와 담판을 벌이지도, 시민들을 설득하지도 않았다. 그 5년 동안, 원고 9명 중 8명이 세상을 떠났다. 대법원에서 같은 결론이 나온 날, 94세의 생존자 이춘식 씨는 눈물을 흘렸다. “혼자 있어서 슬프고 서운하다.”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판결 지연’의 유일한 성과다.
 
감정적 민족주의를 주장하자는 게 아니다. 2012년 대법원 첫 판결과 현 정부 외교정책에 대한 토론은 필요하다. 다만, 판결 지연을 무슨 대단한 치적이나 되는 양 포장하고 미화하는 일만은 하지 말길 바란다. 재판에 그 긴 시간이 걸린 것만으로도 부끄럽고 민망한 일이다.  
 
우리가 누리는 ‘국익’에도 수준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익에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인권과 민주, 재판 독립, 헌법 정신 같은 가치들이 들어가야 진정한 나라다. 그런 나라만이 다른 나라로부터 마음에서 우러난 존중을 받는다.
 
권석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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