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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하다

애들끼리 화해했는데, 법정 달려가는 부모들

중앙일보 2019.07.16 00:02
길 잃은 학폭위 <상> 
서울의 한 고교에 다니던 김수진(가명·당시 고3)양은 2017년 8월 학교폭력(학폭) 가해자로 지목됐다. 예전 남자친구 박준호(가명·당시 고3)군에 대해 SNS에 올린 글이 문제였다. 김양은 박군이 과거에 자신과 사귀고 있을 때 이미나(가명·당시 고3)양과 둘이서 밥을 먹었다는 얘기를 우연히 전해들었다. 김양은 친구와 SNS에서 대화를 주고받다 홧김에 이런 말을 적었다.
 
“그럴 거면 그냥 걔랑 사귀지 그랬어. 아 진짜 생각할수록 짜증나. 따로 만난 게 한두 번이 아니라잖아. 둘 다 ㄹㅇ 암걸림.”
 
김양은 이양의 실명을 적시하진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 이 글을 이양이 보게 됐고, 이양의 부모는 김양의 글이 학교폭력이라며 학교에 신고했다. 곧바로 소집된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는 “김양은 자신이 남자친구와 헤어진 원인 제공자가 이양인 것처럼 허위 내용을 유포해 이양에게 정신적 상해를 가했다”며 서면사과 징계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김양의 부모는 법적 대응에 나섰고, 법원은 학교 측 결론과 달리 김양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 남부지법은 “김양의 글은 대상이 특정되지 않았고, 개인적인 분노의 표현을 넘어선 고의적 허위 사실 유포나 따돌림의 의도도 없어 보인다”며 징계를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법원 “학생끼리 해결하면 학폭 아니다”
 
학폭법 개정안은 지난 3월 국회 교육위를 통과했지만 현재 법사위에 계류중이다. [뉴시스]

학폭법 개정안은 지난 3월 국회 교육위를 통과했지만 현재 법사위에 계류중이다. [뉴시스]

그러면서 재판부는 “소문에 대해 오해를 푸는 것도 청소년기 학생들이 성장하는 과정”이라며 “교우관계에서 흔히 발생할 수 있는 말다툼 등 학생들 자체적으로 해결 가능한 정도의 사안은 학폭으로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현실은 법원의 바람과는 거꾸로다. 2011년 11월 학폭이 신고될 경우 학폭위 개최를 의무화한 학교폭력예방법이 시행된 이후 사소한 다툼도 학폭위에서 징계 여부를 논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안의 경중과 관계없이 학생들 간 갈등이 일어나면 일단 학폭위부터 소집하고 보자는 식이다. 학폭위는 교감을 위원장으로 해 5~10명 규모로 구성된다. 학폭위원 중 절반 이상은 학부모가 위촉된다. 또 학폭 담당 교사와 변호사·판사·의사·경찰(관할 경찰서 소속) 등도 포함된다.
 
전국 초·중·고 학폭위 심의 건수는 매해 가파르게 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3학년도 1만7749건에서 2017학년도 3만1240건으로 80% 가까이 늘었다. 특히 초등학교는 4년 사이 2136건에서 6159건으로 세 배 가까이 증가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학폭위 소집이 늘며 처분에 대한 불복도 많아졌다. ‘징계가 너무 가볍다’며 피해학생이 시·도 학교폭력대책지역위원회에 청구한 재심 건수는 2013학년도 391건에서 2017학년도 1186건으로 급증했다. 가해학생이 ‘징계를 경감하거나 취소해 달라’며 시·도교육청 학생징계조정위원회에 청구한 재심 건수도 같은 기간 373건에서 682건으로 늘었다. 가해학생은 전학과 퇴학 처분을 받았을 때만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
 
재심에도 승복하지 못하면 남은 방법은 법원으로 가는 것뿐이다.
  
“XX 젤 짜증난다” 험담 … 서면사과 징계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이에 ‘탐사하다 by 중앙일보’는 학폭위 처분을 놓고 법정 소송까지 진행된 사건들을 분석해 봤다. 대법원이 인터넷 판결 열람 시스템을 통해 최근 1년(2018년 5월 22일~2019년 5월 19일)간 공개 결정한 학폭위 판결문 138건이 대상이다. 이 중 116건(84%)은 가해학생이 징계를 취소하거나 무효임을 확인해 달라고 제기한 소송이었다.
 
판결문에 원고의 나이가 명시돼 있는 129건 중 학폭위 처분 당시 고교생인 경우가 51건으로 가장 많았다. 중학생이 48건, 초등학생이 30건이었다. 교육청 관계자는 “학폭위에서 징계가 결정되면 예외 없이 학교생활기록부에 기재하기 때문에 대입을 준비하는 고교생 입장에선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법정에 선 학폭 사건의 종류와 수위는 천차만별이다. 광주지법은 올 3월 초등학교 5학년생이 동아리 단체채팅방에서 “(동급생)A가 ‘학교에서 ○○언니가 젤 짜증난다’고 했음”이라고 말한 것이 학폭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을 내놨다. 이 글을 올린 학생 측이 학폭위에서 서면사과 징계를 받자 이를 취소해 달라며 학교장을 상대로 소송을 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학폭이 맞는다고 판결했다. “해당 발언은 A가 다른 학생의 험담을 할 정도로 믿지 못할 사람이라는 취지로, A의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학폭 사건이 형사소송으로 번진 경우도 있다. 지난해 9월 수도권의 한 중학교에서 3학년 B군은 친구인 C군과 장난을 치다 셔츠를 들췄다. C군은 이로 인해 수치심이 들었다며 학폭으로 B군을 신고했다. 학폭위는 B군에게 서면사과·사회봉사 등 징계를 내렸다. B군이 맡고 있던 전교회장직도 박탈했다. B군은 학교를 상대로 징계 및 학생회장직 박탈 무효 확인 청구소송을 냈다. 또 C군에 대해선 명예훼손과 무고 등 혐의로 고소한 데 이어 손해배상 청구소송까지 제기했다. 이에 질세라 C군도 강제추행·협박·명예훼손 등 혐의로 B군을 맞고소했다. 학교 관계자는 “친하게 지냈던 학생들인데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고 말했다.
 
탐사보도팀=유지혜·정진우·하준호 기자 wisep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