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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일본의 경제전쟁 도발, 일본보다 더 생각해야 이긴다

중앙일보 2019.07.15 00:18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한국 기업에 대한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는 치밀하게 준비한 총성 없는 경제전쟁이다. 일본은 강제징용 피해자 대법원 판결을 방치해 한일협정을 무력화시켰다며 문재인 정부의 백기투항을 요구하고 있다. 반도체가 무너지고,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전면적 보복이 시작되면 한국 경제는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조선의 금서 징비록을 연구한 일본
미·영 접근해 조선 식민지로 삼켜
일본 반도체 보복 무방비 뼈아파
대통령이 아베 만나 불부터 꺼야

일본은 한국보다 한국을 더 깊이 연구하는 무서운 나라다. 16세기 임진왜란의 참혹상을 온몸으로 겪은 유성룡은 스스로를 반성해 비극의 재발을 막으려고 징비록을 남겼다. 하지만 조선은 치욕의 기록을 금서로 낙인찍어 봉인했다. 적의 공격을 받으면 모래에 머리를 묻어버리는 타조와 무엇이 다른가.
 
반면에 일본과 중국에선 우물안 개구리인 조선을 요리하기 위한 필독서이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일본은 임란 때 17만 군사를 투입해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잡고 선조를 망명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하지만 명의 개입으로 동아시아의 국제전쟁으로 전환되면서 정벌에 실패했다. 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조선을 더 깊이 파고들었고, 20세기 초 기어코 조선을 식민지로 집어삼켰다.
 
한국은 일본이 일으킨 무역전쟁의 불을 미국이 꺼줄 것을 바란다. 김현종 청와대 외교안보실 2차장이 워싱턴에 날아갔지만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미 주미 일본대사관이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를 다 훑어 ‘입장 정리’를 끝낸 다음에야 한국이 왔다고 한다. 임란의 경험을 통해 일본은 한·일 경제전쟁의 승패가 한국의 동맹국 미국의 의중에 달려 있다는 이치를 알고 대비했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도 목표를 정하면 치밀하게 준비하는 나라임을 입증했다. 먼저 19세의 황혼기에  아시아의 맹주,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해 온 청과 싸워서 이겼다. 마지막 걸림돌인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기 전에는 영일동맹을 맺어 전비를 충당했다.
 
세계 최강인 러시아 발틱함대는 영국이 지배하는 식민지 항구들에 기항할 수 없어 아프리카 대륙의 남쪽 끝 희망봉을 돌아 7개월 만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쓰시마 앞바다에 도착했다. 1905년 5월 일본함대가 발틱함대를 전멸시킨 것은 영일동맹의 결과다. 1905년 7월에는 가쓰라 다로 수상이 미국의 태프트 육군장관과 조선은 일본이, 필리핀은 미국이 갖기로 했다.
 
일본은 이렇게 한국을 주무르기 위해 전 세계를 무대로 크고 작은 전략을 펼치는 나라다. 1995년 김영삼 대통령이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고 하자 1997년 한국을 외환위기로 몰아넣은 나라도 일본이다. 이러고도 일본을 우습게 볼 수 있는가.
 
일본이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로 세계 반도체 시장을 혼돈에 몰아넣을 보복을 하는 것은 명백한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위반이다. 일본은 눈 하나 깜 짝 하지 않는다. WTO는 미국의 비협조로 흔들리고 있다. 한국이 WTO 제소를 하면 거쳐야 할 상소기구에는 7인 위원중 4명이 공석이다. 연말엔 중국 출신 한사람만 남는다. 미국이 후임 선출에 계속 반대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아베와 트럼프가 다섯 번이나 골프장에서 함께 보낸 시간 동안 가쓰라-태프트식의 흥정을 하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베는 한국 문제를 다루는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을 일주일에 세 차례 이상 만난다. 우리 외교부 장관은 “일본이 경제보복을 하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큰소리치더니 워싱턴도, 도쿄도 아닌 아프리카로 떠났다. 전략물자 수출통제 담당 실무자 협의를 하려고 도쿄에 간 우리 관료들은 물 한잔 대접도 못 받고 돌아왔다.
 
사태의 핵심은 경제가 아니다. 일본은 강제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합의 파기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를 문재인 정부에게 묻고 있다. 그 문제가 풀리면 경제보복도 풀릴 것이다. 일본에는 식민지배라는 원죄가 있다. 한쪽에선 사과와 반성을 하면서 다른 한편에선 망언을 반복하는 일본에 먼저 대화를 청하면 토착왜구로 낙인 찍힐 위험성이 있다. 정치인이라면 선거 악영향도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은 달라야 한다. 나를 희생해서라도 국익을 위해 아베에게 어디서든 당장 만나자고 해야 한다. 일본의 무역보복은 잘못됐지만 이번 사태의 빌미는 분명히 우리가 제공했다. 만나서 급한 불부터 꺼야 한다. 그전에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와 관련된 선순환의 움직임을 내놓아야 한다. 여야 추천의 초당적 전문가 위원회를 만들어 대통령 직속으로 두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과잉민족주의에 기댄 맞보복은 평화헌법을 개정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려는 아베와 일본 우익에 날개를 달아주는 일이다.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에서 넘어온 첨단기술이 우리의 고도성장에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다. 일본과 긴밀히 연결된 한국은 미국도, 중국도, 북한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존중받는 나라가 되면 일본 우익의 위험한 망상도 좌절될 것이다. 정보도, 전략도 없이 온 국민을 고통에 빠뜨렸던 아픈 역사를 21세기에도 되풀이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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