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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하느라 일 안하냐" 이런 부장님 내일부터 큰일난다

중앙일보 2019.07.15 00:12 종합 1면 지면보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내일 시행 

‘조문도 우리 병원 사람들은 안 왔으면 좋겠어.’ 지난 1월 직장 내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한 서울의료원 5년 차 간호사 서모씨가 어머니에게 남긴 유서 내용이다. 가족에 따르면 서씨는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업무를 해야 하는 날도 있었다. 커피를 타다가 넘쳤다는 이유로, 신발을 끄는 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선배에게 호되게 혼나곤 했다. 이른바 ‘태움’ 문화였다.
 

인격모독, 부당한 업무지시 대상
성희롱처럼 피해자 증언에 무게
가해자 직접 처벌 규정 없어 한계

서울의 한 중소기업 직원이었던 김모씨는 5월 퇴사한 이후에도 계속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직장상사의 괴롭힘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데이트 신청을 하는 선배에게 “남자친구가 있다”고 답한 이후 김씨를 향한 선배의 교묘한 괴롭힘은 심화됐다. 금요일 퇴근 시간 직전 일을 몰아주고 월요일에 보고하라는 식의 일은 예사였다. 김씨가 사소한 실수를 해도 모든 직원 앞에서 큰 소리로 “연애하느라 일 안 하냐”고 면박을 줬다.
 
오는 16일부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등 개정안)이 시행된다. 서씨와 김씨 같은 피해자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겠다는 취지다. 그동안 폭행이나 성희롱 등은 형법이나 남녀고용평등법 등으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직장 내에서 벌어지는 교묘한 괴롭힘에는 대응할 수 있는 법이 없었다. 개정 근로기준법이 정의하는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만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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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힘 피해자에 대한 보상의 폭도 넓어질 수 있다. 이날 함께 시행되는 개정 산업재해보상법에 괴롭힘으로 인한 업무상 스트레스도 산업재해 범위에 포함된다고 명시했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업무와 질병 간의 인과관계가 밝혀져야만 산업재해로 인정됐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괴롭힘은 직장 내 성폭행 사건과 유사하게 처리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조상욱 변호사(법무법인 율촌)는 “직장 내 괴롭힘 사건도 성폭력 사건과 마찬가지로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의 증언에 좀 더 무게를 두고 함부로 배척하지 않는다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설현천 변호사(법무법인 명장)는 “향후 피해 복구를 위한 적극적인 민사소송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예상했다.
 
상사 갑질로 인한 스트레스도 산재 인정, 피해자 보상 폭 넓어져
 
대기업들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성·현대·SK·LG·CJ 등 주요 대기업은 이미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조항을 넣는 작업을 마쳤다. LG화학 관계자는 “전사 임직원을 대상으로 18일부터 필수적으로 온라인 교육을 실시할 예정”이라며 “16일부터는 ‘괴롭힘 신고센터’도 사내 포털을 통해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물산 관계자도 “전 직원 대상 교육을 완료했고, 실천서약도 받았다”며 “이전에 성희롱 관련 신고채널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직장 괴롭힘 관련 새로운 신고채널도 마련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SK·CJ 등에서는 이미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했을 경우 즉시 신고 가능한 사내 익명게시판을 만들어 운영 중이다.
 
직장 내 괴롭힘 이슈 등 리스크 관리를 위한 서비스들도 등장하고 있다. 취업 포털 잡플래닛은 ‘ALRI(Alert Risk)’ 서비스를 내놓았다. 전·현직 직장인들이 잡플래닛에 익명으로 제보한 정보나 뉴스 보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분석 등을 통해 매월 이슈 동향 리포트를 제공한다. 주요 법무법인에서는 직장 내 괴롭힘 대응팀을 구성해 기업에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괴롭힘 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노동팀을 주축으로 회사 자문, 위기관리 등 내부조사 전문 인력이 괴롭힘의 사실관계를 객관적으로 규명해 기업에 정책적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장밋빛 전망’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사용자의 능동적 조치를 강제할 규정이 없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을 인지했지만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태료나 벌금 등으로 처벌할 수 없다. 현재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있는 처벌조항은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하면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는 내용 뿐이다.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발생하면 가해자는 물론 사용자도 처벌될 수 있는 호주·노르웨이 등과 대조적이다.
 
사용자 본인이 괴롭힘의 가해자일 경우에도 피해자가 보호받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따르면 신고를 받고 조치를 취해야 하는 주체가 사용자로 돼 있기 때문이다. 비교적 규모가 큰 회사의 경우 이사회나 감사 등을 통해 사용자에 대한 조치가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제대로 문제제기를 하기 어려운 구조다. 한 중소기업에 재직 중인 50대 차장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라는 이슈 자체를 전혀 몰랐다”며 “회사 나갈 각오 하고 문제를 제기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직장인들은 실질적 효과에 대해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괴롭힘 행위 명문화에 의의를 둔다는 분위기다. 한 대기업 5년 차 대리는 “같은 업무 지시도 굉장히 모욕적인 언사로 하던 직장 상사의 발언 수위가 많이 달라졌다”며 “언제까지 갈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자기검열에 들어간 상사들이 늘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대기업 8년 차 과장은 “일부 상사들은 ‘이것까지도 괴롭힘인가?’ ‘이제 후배들한테 아무 말도 못 하겠네’라고 투덜대긴 하지만 ‘부당한 업무 지시와 인격 모독은 안 된다’는 기준이 마련되는 분위기”라며 “과거 미투 열풍이 처음 불었을 때와 유사하다”고 평가했다.
 
이후연·신혜연 기자 lee.hoo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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