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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단장 시절 최덕신 [중앙포토]

1군단장 시절 최덕신 [중앙포토]

지난주 화제의 인물 중 한 명은 월북한 최인국이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엘리트 관료의 길을 걷다가 돌연 월북한 최덕신 전 외무부 장관의 둘째 아들인 것이 알려지면서 분단이 만든 비운의 가족사로 재조명받기도 했습니다. 또, 독립운동가 최동오의 아들이자 한국광복군을 거쳐 6·25 전쟁 당시 사단장을 지내고 박정희 정부에서 외무부 장관과 주 서독대사를 지낸 최덕신의 과거도 다시 주목을 받았죠.

[유성운의 역사정치]

 
하지만 이들 가족을 마치 분단의 피해자로만 포장하는 것에는 다른 목소리를 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최덕신이라는 인물은 분단의 피해자가 아니라 어쩌면 분단의 가장 큰 수혜자가 아닐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류미영 전 북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의 차남 최인국 씨가 북한에 영구거주하기 위해 지난 6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북한 대남 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가 7일 보도했다. 평양국제비행장에서 최씨가 도착소감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류미영 전 북한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의 차남 최인국 씨가 북한에 영구거주하기 위해 지난 6일 평양에 도착했다고 북한 대남 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가 7일 보도했다. 평양국제비행장에서 최씨가 도착소감을 발표하는 모습. [연합뉴스]

 
독립운동 집안-국군 장성-박정희 정부 고위관료 거친 우파 엘리트  

1913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난 최덕신은 3·1운동에 참여한 부친 독립운동가 최동오를 따라 9세 중국으로 건너가 일찌감치 항일운동의 영향 아래 자랐습니다. 1936년엔 중화민국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해 중국군 장교로 복무했는데 1945년엔 중국군 상교(대령)로 진급했을 정도로 능력도 인정받았습니다. 해방 후 1946년 귀국 당시엔 김일성 등 공산주의 세력이 장악한 고향 대신 남한을 택했을 만큼 강력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중국에서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은 최덕신은 1947년 육군사관학교 3기로 졸업한 뒤 1949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6·25 전쟁 발발과 함께 귀국해 한·미군의 반격이 시작된 9월 11사단장을 맡았습니다. 11사단은 경남 일대에서 후방 안정화 작업을 맡게 됐는데 이때 거창 양민학살사건이 벌어집니다.
1956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월남대사 임명장을 받는 최덕신 [국가기록원]

1956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월남대사 임명장을 받는 최덕신 [국가기록원]

 
거창 양민학살사건의 주역  
경남과 전남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입니다. 
경남 일대에서 활동하던 11사단은 1951년 2월 5일부터 일주일 동안 거창군 일대에서 민간인들을 안전 지역으로 피난시키고 빨치산과 분리한다며 주민들을 대거 학살했습니다. 
특히 2월 11일엔 와룡리·대현리·중유리 일대 주민 1000여명을 신원국민학교에 모이게 한 뒤, 군인과 경찰 공무원 가족만 돌려보내고 나머지 주민들은 빨치산과 내통한다며 총살했는데, 기록에 의하면 당시 희생된 주민 중에는 15살 이하 남녀가 359명, 16~60살 300명, 60살 이상 노인이 60명이 포함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11사단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주검에 휘발유를 뿌려 불을 붙이고 매장하기도 했습니다.  
경남거창군신원면 양민학살사건 희생자 합동묘역. 1951년 2월 10, 11일이 이틀새 남녀노서 7백59명이 몰살당한 현장엔 39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상은 커년 위령탑마저 세워져있지 않다. 봉분앞에 쓰러져있는 추모비가 유족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중앙포토]

경남거창군신원면 양민학살사건 희생자 합동묘역. 1951년 2월 10, 11일이 이틀새 남녀노서 7백59명이 몰살당한 현장엔 39년이 지난 지금까지 보상은 커년 위령탑마저 세워져있지 않다. 봉분앞에 쓰러져있는 추모비가 유족들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중앙포토]

 
당시 생존자 중 한 명인 최금자씨의 증언은 당시 참혹했던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엄마가 숨 막히듯 나를 껴안는 순간, 천지를 뒤덮는 듯한 총소리가 들리고 나는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깨어나 보니, 엄마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몸뚱이만 나를 안고 엎어진 채였다.”
 
이 사건은 전쟁 와중이던 당시에도 큰 문제로 비화해 관련 군 지휘부가 조사를 받고 일부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 등 파장이 컸습니다. 11사단은 거창뿐 아니라 함양, 산청군 등에서도 비슷한 만행을 저지른 것이 나중에 확인됐고, 내무·법무·국방부 장관이 모두 사임하고, 11사단장 최덕신은 직위해제 됐습니다. 
 
하지만 무기징역에서 3년형 등이 선도된 관련자 대부분은 1년 후 보석으로 출감했습니다. 또 법적 처벌을 피한 최덕신의 도움으로 군으로 복귀한 것은 물론이고 일부는 군 장성으로, 일부는 지자체장으로 임명되는 등 요직에 앉게 됩니다.
백선엽 육군참모총장과 악수하는 최덕신 [국가기록원]

백선엽 육군참모총장과 악수하는 최덕신 [국가기록원]

최덕신이 처벌을 면한 것은 재판에서 직접적 관련성이 부인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산청·함양·거창·함평 등 광범한 지역의 학살사건이 모두 11사단 지역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참작하면 사단장인 최덕신이 몰랐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설령 몰랐다고 해도 책임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또 당시 학살을 지휘한 일부 간부가 거창학살에 직전 연대 작전회의에서 “사단 작전회의에서 지시됐다”고 발언했다는 증언이 나왔고, 1951년 12월 16일 대구 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관선변호인이던 조승각 소령조차 “사단 작전처를 거쳐 사단장이 승인한 작전"이라며 "사단 작전방침에 근본적으로 어그러지는 것이면 사단장이 묵인했을 리 만무하다”고 발언하는 등 군내에서도 최덕신이 개입됐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서독 대사 때는 동백림 사건에도 관여  
최덕신은 박정희 정부에서도 승승장구했습니다. 
1961년 외무부 장관을 지낸 뒤 1963년부터는 서독 대사를 지내게 됩니다. 박정희 정부는 서독 정부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 보내고 경제적 지원을 받는 방안을 추진했기 때문에 서독은 중요한 국가였습니다.
그러다가 1967년 ‘해방 이후 최대의 간첩단사건’으로 불린 소위 동백림(東伯林·동베를린) 사건이 터집니다. 진상발표만 총 7차례 이루어지고 관련자가 200명 가까이 되는 등 역대 최대 규모의 공안사건이기도 했지만, 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학자·예술가·유학생·광부·간호사 등 지식인층이 연루되었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동백림간첩단 사건 공판 [중앙포토]

동백림간첩단 사건 공판 [중앙포토]

당시 박정희 정부는 관련자들을 한국으로 귀환시켰는데 이 문제로 서독 정부와 큰 갈등을 빚게 됩니다. 서독 정부는 한국인들이 자국 영토에서 실종됐으며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 연행됐다며 송환을 요구했습니다. 반면 박정희 정부는 시국사범이라는 이유로 송환을 거부해 큰 외교적 갈등으로 비화했습니다.
서독의 대연정 공동 집권당인 사민당 대변인이 성명을 통해 최덕신 주독 대사를 본국으로 송환시키고 남한과 국교를 단절해야 한다고 요구하기까지 했죠. 결국 양두원 참사관 등 3명은 1967년 7월 17일 서독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주서독대사 시절 최덕신 [중앙포토]

주서독대사 시절 최덕신 [중앙포토]

훗날 최덕신은 이에 대해 회고하며 강제납치를 인정하면서도 양두원 참사관이 이를 주도했고 자신은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해명했습니다만 사건 초기부터 최덕신이 대사로서 이에 깊숙하게 연루됐다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이랬던 최덕신은 여비서와의 정사 사건이 논란이 되면서 한국으로 귀환 조치 됐고, 이후 박정희 정부와 등지게 됩니다. 특히 천도교령을 맡을 정도로 천도교에 영향력이 컸던 그는 정부 지원 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다가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1986년 가족들을 남겨둔 채 북한으로 망명합니다.
 
반공 투사의 화신과도 같았던 그였지만 북한에서도 남한 못지않게 잘 나갔습니다. 남한의 고위직 인사라는 점에서 홍보 효과가 컸기 때문이죠. 그를 다룬 영화('민족과 운명')가 제작되는가 하면 사망했을 땐 북한의 최고위 혁명 열사들만 갈 수 있다는 대성산혁명열사릉에 묻혔습니다. 그가 6·25 전쟁과 동백림 사건에서 보인 행보를 떠올려보면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죠. 
최덕신 전 외무부 장관(왼쪽)이 부인 류미영(오른쪽)과 생전 김일성 주석을 만난 모습. [중앙포토]

최덕신 전 외무부 장관(왼쪽)이 부인 류미영(오른쪽)과 생전 김일성 주석을 만난 모습. [중앙포토]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최덕신의 비석 [중앙포토]

북한의 애국열사릉에 세워진 최덕신의 비석 [중앙포토]

 
[유성운의 역사정치]
거창 양민학살은 어떻게 알려졌을까  
그런데 다시 시간을 뒤로 돌려보겠습니다.
11사단이 거창에서 집단 총살을 하고 시체까지 암매장하며 증거인멸을 시도했던 이 사건은 어떻게 알려지게 됐을까요.
11사단이 대한민국 남반부에서 양민학살로 악명을 떨칠 때 몇몇 생존자들이 간신히 몸을 피해 참상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들어준 사람은 2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신중목 의원이었습니다.
신중목 의원 [중앙포토]

신중목 의원 [중앙포토]

 
학살이 벌어진 뒤 얼마 지나지 않은 1951년 2월 15일 대한청년단 거창군 부단장 함차산이 당시 임시수도 부산에 있던 신중목 의원을 찾아옵니다. '우리 군에 의해 거창에서 민간인들이 500명 넘게 죽었다'는 말에 신 의원은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며 처음에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파 청년단 간부가 이를 과장했을 것 같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신 의원은 직접 확인하기 위해 이틀 뒤 거창으로 향했고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거창경찰서로부터 피학살자 517명에 대한 정보도 입수했습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은폐하기 전 신속하게 움직인 덕분이었습니다.  
 
한편 신 의원뿐 아니라 경남 산청, 함양 등 인근 지역 국회의원들도 이를 전해 들었지만 대부분 묵살하거나 군과 경찰의 압력에 의해 침묵을 지켰습니다. 신 의원 역시 당시 서슬퍼런 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수차례 압력과 회유를 받았습니다. 
한 달여간 고민하던 그는 결국 3월 29일 부산의 한 극장에 꾸려진 임시국회에 나가 진상을 폭로합니다. 국회 폭로 하루 전까지도 이성주 경남경찰국장으로부터 회유를 받았다고 합니다.
 
6.25 전쟁 와중에 꾸려진 제2대 임시국회 [국가기록원]

6.25 전쟁 와중에 꾸려진 제2대 임시국회 [국가기록원]

당시 국회회의록을 찾아보니 이렇게 기록되어 있더군요.  
 
“부의장 장택상=신중목 의원으로부터 거창사건보고가 있답니다. 신중목 의원 나오세요. 그런데 신중목 의원의 요구가 본 보고는 비밀회의에서 하는 일이 좋다고, 그런 요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의 없으세요? ( “이의 없습니다” 하는 이 있음) 그러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전 10시 20분 비공개회의 개의 전환, 11시 25분 공개회의 개의- 

(1951년 3월 29일, 제2대 국회 제54차 본회의)
 
비공개로 진행된 이 1시간 동안 어떤 말이 오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훗날 증언자들에 의하면 동료 의원들의 반응이 호의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피살자가 양민인지 아닌지 신중목 의원이 현장에서 확인하지 못했다고 말하자 황당해하면서 퇴청하는 의원들도 있었고 미확인 보고로 물의서도 일으킨 신중목 의원을 징계하자는 움직임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정부도 버텼습니다. 신성모 국방장관은 군이 학살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으니 국방부의 조사가 완료될 때까지 비밀 유지를 당부했고, 조병옥 내무장관은 자체 조사한 자료를 국회에 공개할 수 없다고 버텼다고 합니다. 또 공산당의 통치를 받은 주민들이 ‘공비’에게 정보를 제공했고 군경이 ‘공비’를 토벌한 사실만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6.25 전쟁 와중에 꾸려진 제2대 임시국회 [국가기록원]

6.25 전쟁 와중에 꾸려진 제2대 임시국회 [국가기록원]

 
어렵게 1951년 4월 7일 국회 차원의 합동진상조사단이 꾸려져 신원면 사건 현장으로 갔지만 여기서 기상천외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길 안내를 맡은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이 신성모 국방장관과 모의해 국군을 빨치산으로 위장시킨 뒤 사건 현장 인근 계곡에서 진상조사단에게 사격을 가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진상조사단은 조사를 못 하고 되돌아갔습니다. 
결국 5월 14일 국회에서 “사단장 이하 각 책임자와 현지의 행정책임자를 준엄하게 처벌”하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통과하는 수준으로 마무리됐고 군 재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앞서 언급했듯 관련자들이 금새 보석으로 풀려나고 복권되긴 했지만, 이 재판의 기록은 거창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남았습니다. 4·19 이후 분위기가 반전되면서 언론의 취재와 국회의 진상 노력이 이어졌고 2014년 특별법(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면서 신중목 의원의 노력은 60년만에 빛을 보게 됩니다.  
4월 8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 거창사건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8주기 거창사건희생자 추모식 [중앙포토]

4월 8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 거창사건추모공원에서 열린 제68주기 거창사건희생자 추모식 [중앙포토]

  
어느 친일파의 일생
신중목은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엘리트로 일제 강점기에 거창군 서기와 거창읍 협의원을 지내는 등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관료입니다. 또 양조장 등을 경영하며 큰돈을 벌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해방 후에도 미군정에서 거창군수로 임명되고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원까지 했으니 어떤 사람들 기준에 의하면 ‘토왜(土倭)’, 요즘 말로는 '토착왜구'의 상징 같은 인물이죠.
최덕신이 전성기를 누리던 5·16 이후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는데, 수 차례 낙선하고 별다른 두각을 보이지 못하다가 1982년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그가 사망하고 약 20년 뒤 거창사건 추모공원이 조성됐습니다. 그곳에 가면 학살사건의 유족들이 세운 신중목 공적비를 볼 수 있습니다. 공적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신중목 의원은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활동하던 중 무고한 거창군 신원면민 719명이 국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신 의원은 참담한 사실에 망연자실하였지만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야겠다는 일념으로 정의롭게 폭로하여 온 국민의 공분과 함께 만천하에 진실을 알리었다… 이후에도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끈질긴 집념으로 학살 주범들을 고등군법회의에서 살인죄 등의 실형을 선고받게 하였다. 이런 결과는 거창 양민 학살사건이 6.25를 전후하여 당시 법적 조처를 받은 유일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오늘날 양민학살의 진실을 밝히는 길잡이가 되었다. 신 의원의 업적은 지금의 특별법 제정의 근거가 되었고 추모 공원 조성에 힘이 되었기에 유족들이 뜻을 모아 조그마한 공적비를 여기에 세운다.
 
2015년 8월 4일 거창사건희생자 유족회”
거창사건추모공원에 세워진 신중목 의원 공적비 [이근진 제공]

거창사건추모공원에 세워진 신중목 의원 공적비 [이근진 제공]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갖게 된 의문 중 하나는 ‘한 인간의 일생을 과연 몇 마디 단어로 규정하고, 꼬리표를 붙이는 것이 가능할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자라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최덕신은 6·25 전쟁에서 양민들을 학살하는데 관여했고, 일제강점기 관료였던 거물 친일파는 군경의 협박과 회유에 굴하지 않고 참상을 알리는 한편 양민들을 보호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누구를 의인으로 평가하고 누구를 애국자라고 불러야 할까요. 역사는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박명림 『국민형성과 내적 평정; 거창사건의 사례 연구-탈냉전 이후의 새 자료, 정신, 해석』, 이정민 『동백림 사건을 둘러싼 남한정부와 서독정부의 초기 외교갈등』, 이창현 『제2대와 제4대 국회의 학살사건 처리 비교 연구-특별위원회 활동을 중심으로-』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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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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