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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지금 외교장관이 아프리카 순방할 때인가

중앙일보 2019.07.12 00:10 종합 30면 지면보기
강제징용 판결에 따른 일본 경제보복이 날로 심각해지는 가운데 중심에서 분투해야 할 외교부가 통 보이질 않는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0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의 무역제한은 미국 기업은 물론 세계 무역 질서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트럼프 행정부의 도움을 요청했다고 한다. 한데 전화를 건 곳이 에티오피아였다. 강 장관이 지난 10일부터 에티오피아·가나·남아프리카 등 아프리카 3개국 출장길에 나섰던 것이다. 아무리 외교 다변화가 중요해도 한·일 간 무역분쟁이 발등의 불인 터에 외교수장이 이국땅을 돌아다니는 게 옳은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번뿐 아니다. 강 장관은 화웨이 금수를 둘러싼 미·중의 압박이 심각했던 지난달 22일에는 주한 외교단 52명과 함께 ‘DMZ(비무장지대) 평화의 길’을 찾아 눈총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정부 내 최고 실세 일본통으로 꼽히는 이낙연 총리마저 내일부터 방글라데시 등 4개국 순방에 나선다. 그러니 “기업들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떨고 있는데 여유롭게 변방 순방을 다닐 때인가”라는 야당 측의 날 선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무대에서 사라진 건 강 장관 개인뿐이 아니다. 미국의 도움을 빌려 한·일 간 분쟁을 조금이라도 무마하기 위해 워싱턴으로 날아간 건 외교부 고위층이 아닌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다. 또 산업통상자원부 소속인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도 다음 주 방미할 예정이다. 외교부에선 김희상 양자경제외교국장이 갔지만 경량급이다. 진작 예상됐기에 잘만 하면 막을 수 있었던 일본의 보복이 일어난 과정을 살펴보면 외교부가 제대로 뛴 흔적을 찾기 어렵다. 외교부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외교부는 일본통을 키우기는커녕 기존의 전문가마저 홀대하는 바람에 대일 외교력을 크게 잃는 잘못을 저질렀다. 실제로 주일 한국대사관의 정무2공사와 이상덕 전 동북아 국장은 지난 정권 때 한·일 위안부 합의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인사상 불이익을 당했다. 이번 일본 보복 사태를 진두지휘해야 할 주일 한국대사관 경제공사는 4개월째 공석이다. 지난해 말에는 주일 대사관에서 일할 서기관급 외교관을 모집했지만, 지원자가 한 명도 없었다. 일본 전문가 선배들의 몰락을 본 후배 외교관들이 망설인 탓이다. 유능한 일본 전문가를 숱하게 잃고 관련 업무를 맡겠다는 자원자도 없는 터에 외교부가 제구실을 할 리 없다.
 
이제라도 ‘눈치만 있고 영혼은 없는 부처’라는 평가를 받아온 외교부가 제 몫을 하려면 장관 등 수뇌부들부터 소신있는 전략과 목소리를 내야 한다. 아울러 청와대가 옥상옥(屋上屋)으로 군림하면서 모든 걸 참견하고 짓누르는 구태도 벗어던져야 한다. 그래야 외교부가 소신껏 일할 수 있다. 고도의 전문성과 경험이 필요한 외교는 이념의 정치 대신에 마땅히 전문외교관에게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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