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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음식 차리는 놀이 '습례국' 국한혼용으로 만든 뜻은

중앙일보 2019.07.11 09:00
[더,오래]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52)
탁와 정기연이 고안한 습례국의 판과 육각형 전자(轉子), 그리고 숫자와 음식이 적혀 있는 다수의 설자(設子).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탁와 정기연이 고안한 습례국의 판과 육각형 전자(轉子), 그리고 숫자와 음식이 적혀 있는 다수의 설자(設子).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조선시대 선비들은 한글 창제 뒤에도 한문을 즐겨 썼다. 그들이 공부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한 많은 서책과 남긴 글을 모은 문집은 대부분 한문이다. 문집을 물려받은 현대 후손은 국역하기 전엔 그 내용을 짐작하기 어렵다. 이런 흐름은 나라가 망한 일제강점기를 거쳐 서당‧향교 대신 지금과 같은 근대식 학교가 등장할 때까지 계속됐다.

 
제사상 차림 설명한 국한혼용의 ‘습례국’
100년 전인 1919년 경북 경산의 한 선비가 바둑판처럼 생긴 놀이기구를 만든다. 이름 붙이기를 습례국(習禮局). 그는 사각형 판 위에다 맨 위 가운데 ‘習禮局’이라는 한자를 쓰고 왼쪽에는 ‘례 익키는 판’이라 적었다. 그는 한자가 나올 때마다 국한혼용으로 표기했다.
 
여기서 예는 제례를 뜻한다. 습례국은 제사상 차리는 방법을 놀이를 통해 익히게 하고 있다. 한자와 한문을 잘 모르는 어린이와 여성들이 제사상 차림에 익숙해지도록 배려한 것이다. 기구는 정교하다.
 
습례국의 판에 1부터 22까지 번호가 붙어 있다. 번호마다 제사상에 올려지는 음식의 이름이 나온다.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습례국의 판에 1부터 22까지 번호가 붙어 있다. 번호마다 제사상에 올려지는 음식의 이름이 나온다.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선비는 놀이를 위해 0∼3 숫자가 새겨진 윷가락에 해당하는 굴리는 육각형 ‘전자(轉子)’를 만들었다. 또 제사상에 올리는 22가지 음식 이름이 한글과 한자로 적힌 윷말에 해당하는 네모난 22개 ‘설자(設子)’도 고안했다.
 
놀이 방법은 윷놀이와 비슷하다. 편을 갈라 어느 편이든 22가지 제사 음식을 먼저 차리면 이긴다. ‘습례국도설’이란 글에는 이러한 제사상 차림과 놀이 방법 등이 적혀 있다.
 
습례국을 고안한 선비는 탁와(琢窩) 정기연(鄭璣淵‧1877∼1952) 선생이다. 탁와는 유학자로 많은 글을 남겼다. 대부분 한문이다. 그의 문집 『탁와집』은 11책에 이른다. 이 문집에는 국한혼용 ‘습례국도설’도 이례적으로 실려 있다. 한학자나 다름없는 유학자의 문집으로 파격이 아닐 수 없다.
 
습례국에 딸린 사용설명서에 해당하는 ‘습례국입문’. 국한혼용이다.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습례국에 딸린 사용설명서에 해당하는 ‘습례국입문’. 국한혼용이다. [사진 국립한글박물관]

 
습례국의 실물은 지금 국립한글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후손들이 기증했다. 2013년 한글박물관 개관을 준비하던 홍윤표 전 연세대 교수는 습례국도설 사연을 『한글 이야기』에 소개한다. 그걸 본 후손이 연락하자 홍 교수는 “습례국이 집안에 없느냐”고 물었고 후손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던 실물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한글박물관은 습례국을 통해 선비들의 한글 사용 사례를 주목한 것이다. 탁와는 이렇게 한학자로서 한글의 효용성에 일찍이 눈을 떴다. 그렇다고 탁와가 한글만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1945년 광복 이후 한동안 한자폐지론과 한글전용론이 제기된 적이 있었다.
 
1947년 71세 탁와는 ‘옥석문답(玉石問答)’이라는 글에서 이와 관련한 생각을 밝힌다. 한자폐지론에 대한 반론이다. 그는 수천 년 동안 한문을 쓰다가 갑자기 한글만 쓰자는 것은 손발이 움직이는 것만 생각하고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원기를 끊는 것과 같다고 주장한다. 뼈대인 한자와 살가죽인 한글이 다같이 있어야 훌륭한 체격이 된다는 것이다.
 
한글의 효용성에 눈 뜬 한학자
탁와 정기연이 습례국을 고안해 보급하고 저술한 공간인 경북 경산시 옥곡동의 ‘우경재(寓敬齋)’(위). 6일 경산시 나라얼연구소에서 열린 탁와 정기연 학술강좌에서 조원경 이사장이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아래). [사진 백종하, 권정호]

탁와 정기연이 습례국을 고안해 보급하고 저술한 공간인 경북 경산시 옥곡동의 ‘우경재(寓敬齋)’(위). 6일 경산시 나라얼연구소에서 열린 탁와 정기연 학술강좌에서 조원경 이사장이 기조강연을 하고 있다(아래). [사진 백종하, 권정호]

 
경산의 나라얼연구소(소장 황영례)는 7월 6일 탁와의 후손과 시민 등 1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경산의 대유학자 탁와 정기연 선생의 발견’이란 학술대회를 열었다.
 
나라얼연구소 조원경 이사장이 기조 강연을 하고, 김유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이 ‘탁와의 산문세계’를 발표했으며 이어 필자가 유학자로 한글을 사랑한 탁와의 생애 등을 강연했다. 나라 잃은 선비의 창의적인 한글 사랑과 국한혼용이 예사롭지 않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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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호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ㆍ중앙일보 객원기자 필진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 은퇴하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는 문중 일도 있다. 회갑을 지나면 가장을 넘어 누구나 한 집안의 어른이자 문중을 이끄는 역할을 준다. 바쁜 현직에 매이느라 한동안 밀쳐 둔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 보려고 한다. 우리의 근본부터 전통문화, 관혼상제 등에 담긴 아름다운 정신, 잘못 알고 있는 상식 등을 그때그때 사례별로 정리할 예정이다. 또 영국의 신사, 일본의 사무라이에 견줄 만한 우리 문화의 정수인 선비의 정신세계와 그들의 삶을 한 사람씩 들여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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