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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번도 더 들었다, 마누라가 쓴 인생 장편소설

중앙일보 2019.07.10 10:00
[더,오래] 강인춘의 웃긴다! 79살이란다(36)
[일러스트 강인춘]

[일러스트 강인춘]

 
손목 관절염을 앓고 있는 마누라 대신에
오늘 저녁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녁 먹은 설거지는 내 차지다.
그릇은 윤이 번쩍번쩍 나게 닦았고
개수대에 흘린 물기도 행주로 말끔히 닦아놓았다.
설거지 끝~!
 
이제부터는 자유로운 내 시간이다.
TV가 있는 거실 소파에 리모컨을 들고 길게 몸을 뉘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마누라가 주방 식탁에 앉아서 호출한다.
웬일일까? 해 놓은 설거지에 이상이 있는 걸까?
 
식탁엔 어느 사이 펼쳐놓은 신문지 위로 마른 멸치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매일 똑같은 정치 뉴스 봐선 뭣해?
그 시간에 멸치 똥이나 발라내면 살림에 보탬이 되잖아.
왜, 싫어욧?”
 
‘싫다, 좋다!’라는 멍청이 같은 대답을 해서
마누라에게 몇 번의 호된 시련을 겪은 전력이 있었기에
이제는 더 이상의 토를 달지 않기로 작정했다.
무슨 일이든 시키면 시키는 대로 군소리 없이 하는 게 신상에 편했다.
 
지금 이 시각부터 나는 끽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마누라 맞은편에 꼼짝없이 앉아 멸치 똥을 하나하나 발라내야 한다.
그리고는 마누라가 결혼해서부터 쓴 ‘인생 50년’ 장편 소설 제10편을
들어야 하는 한 시간여의 인고의 시간을 버텨야 한다.
 
듣는 중간, 중간 내 얼굴에서부터 등 쪽으로 식은땀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기도 하지만 끝까지 참아야 한다.
만약에 중간에 조금만치라도 부정의 소리를 냈다가는
더욱더 잔인한 내용의 소설 제11편으로 넘어가야 한다.
 
‘마누라! 좀 짧은 단편소설은 없을까?’
79살 먹은 나는 감히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고
가슴 속으로만 통사정해본다.
 
강인춘 일러스트레이터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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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춘 강인춘 일러스트레이터 필진

[강인춘의 웃긴다! 79살이란다] 신문사 미술부장으로 은퇴한 아트디렉터. 『여보야』 『프로포즈 메모리』 『우리 부부야? 웬수야?』 『썩을년넘들』 등을 출간한 전력이 있다. 이제 그 힘을 모아 다시 ‘웃겼다! 일흔아홉이란다’라는 제목으로 노년의 외침을 그림과 글로 엮으려 한다. 때는 바야흐로 100세 시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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