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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메모리마저 빼앗길까봐…일본, 한국 반도체 미래 때린 것"

중앙일보 2019.07.10 02:00 경제 2면 지면보기
"일본의 소재 수출 제한은 한국의 '반도체 패권'이 커지는 걸 막으려는 정밀 타격이다." 
반도체 전문가이며 지일(知日)파인 양향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은 일본과의 소재 수출 갈등을 ‘기술패권’으로 설명했다. 8일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중앙일보와 한 인터뷰에서다.

지일파 반도체 전문가, 양향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 인터뷰

그는 "메모리 반도체에서 한국은 27년째 1위인데 이 점유율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며 "역사상 한국이 미국·일본을 포함해 전 세계를 이렇게 압도한 분야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각국이 모두 4차 산업 선도국이 되겠다고 선언하지만, 어느 나라도 한국 반도체 없이 4차 산업 혁명은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했다. 1차 산업 혁명기에 증기기관 개발과 같은 기술을 한국이 쥐고 있다는 의미다.
 
각국이 4차산업 외치지만 한국 반도체 없이 불가 
양 원장은 “한국이 메모리에서 거머쥔 패권을 비메모리에서도 확보해 반도체 양 날개를 다 갖추는 것을 일본은 두려워한다”며 “그런 면에서 일본의 소재 수출 제한은 현재보다 미래를 위협한다”고 했다.
양향자 원장

양향자 원장

양 원장에 따르면 모바일기기가 확산하는 4G(세대) 이동통신 시대까지는 메모리 수요가 급증했다. 그러나 5G 시대에는 VR·AR 등에서 비메모리 수요가 급증할 수밖에 없다. 그는 “그런 면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이 133조원을 투입해 비메모리 1등을 선언한 것은 기술 흐름상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메모리는 소품종 대량생산, 즉 수율(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 경쟁이 벌어지는 분야지만, 비메모리는 다품종 소량 생산으로 주문이 들어오면 생산을 시작한다"며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스펙의 제품을 만들어주는 게 비메모리 사업의 경쟁력"이라고 했다. 일본에서 소재 하나 들어오는 데 90일씩 걸리면 파운드리(위탁생산) 사업은 아예 할 수가 없다는 얘기다.
 
비메모리, 전쟁 중 실탄 못 받는 상황 올 수도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대한 진단도 내놨다. 그는 “현재 비메모리는 세계 1위인 대만 TSMC(점유율 약 49%)를 삼성전자(약 19%)가 맹추격하는 양상”이라며 “핵심 승부처인 ‘7나노 극자외선 공정’은 전 세계에서 (TSMC와 삼성) 단둘만 벌이는 게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공정에 꼭 필요한 장비가 네덜란드에서 만드는, 대당 1500억원짜리 노광장비”라며 “올해 네덜란드가 생산한 노광장비 30대 중 TSMC가 18대를 예약해 생산시설 60%를 선점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마당에 소재마저 끊기면, 전쟁 중에 실탄을 못 받는 상황이 온다”고 했다.
 
일본 조치, 전 세계를 피해자로 만든다
그는 "반도체와 소재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도 강조했다. 소재와 반도체가 함께 성장한다는 의미다. 양 원장은 “일본이 세계 90%를 점유한다고 자랑하는 그 소재의 생산에도 반도체가 들어갈 것이다. 각국의 군수용품에도 반도체는 필수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반도체 기술패권이 강하다는 것은, 일본의 조치가 한국이 아닌 전 세계를 피해자로 만든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해법으로는 정경 분리 원칙과 국제사회 공조를 강조했다. 그는 “강제노역은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은 과거”라며 “피해자가 엄연히 있는 문제를 경제 분야로 비화시키는 것은 (일본의)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했다. 그는 "반도체는 500개가 넘는 공정을 맡은 누구 하나가 자신의 잘못을 얘기하지 않으면 대거 불량품이 나오는 양심 산업"이라며 "이 산업에서 한국이 세계 최고가 돼 전 세계 공급을 담당하는데 (일본이) 비양심적 조치로 공급망을 붕괴시켜선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에 과거사는 과거사대로 풀되 경제는 협력적 경쟁 관계로 가자는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했다.
 
 
 
일본 재계서도 "아베가 너무 나갔다"  
양 원장은 이른바 ‘문재인 키즈’로 정치권에 영입되기 직전인 2016년 1월까지 삼성전자에서 플래시메모리 설계·감수 팀을 진두지휘했다. 고졸 사무 보조에서 반도체 개발 임원에 오른 신화의 주인공이다. 여기엔 입사 직후 정진한 일본어 실력이 한몫했다. 고 이병철 회장은 1987년에 별세하기 전에 일본 내 최고 반도체 전문가로 당시 NTT 전무였던 하마다 시게타가(95) 부부를 '88 서울 올림픽'에 초청할 뜻을 내비쳤다. 하마다 박사는 이병철 회장이 '호암자전'에서 반도체 은인으로 여러 번 언급하는 인물로 이 회장과는 친형제처럼 지냈다. 고졸사원 양향자가 이때 하마다 박사 부부의 통역 안내를 맡았다. 이 인연이 31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간 하마다 박사와 주고받은 손편지만 1000통이 넘는다. 
 
양 원장은 소재 공급 문제가 터지고 난 지난 주말, 하마다 박사와 전화 통화한 내용을 들려줬다. 그에 따르면 하마다는 "일본 경제계 내에서도 아베가 ’너무 나갔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반도체라는 독특한 산업 생태계 사슬을 알면 할 수 없는 조치다. 시간이 지나면 (고품질 반도체 공급 문제로) 세계에서 들고 일어날 일”이라고 했다고 한다.
 
한-일 갈등 길어지면 중국, 대만만 유리
양향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이 8일 충북 진천에 있는 인재개발원에서 일본의 소재 수출 제한으로 생길 반도체 시장 영향을 설명하고 있다. 박태희 기자

양향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장이 8일 충북 진천에 있는 인재개발원에서 일본의 소재 수출 제한으로 생길 반도체 시장 영향을 설명하고 있다. 박태희 기자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대해서도 평가했다. 그는 "반도체 성장에는 세가지 환경이 필요하다. 장기간의 기술 축적, 대규모 시장, 기술 인재"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국은 미국 IT기업이라는 거대 시장의 ‘하드웨어 파트너’가 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대규모 시장과 장기적 축적이라는 두가지가 없다"고 했다. 돈을 쏟아부어도 금세 쫓아갈 수 없는 게 반도체 기술이라는 의미다. 그는 "더구나 반도체는 승자 독식(Winner takes all) 시장"이라며 "중국은 민간기업 아닌 정부 돈을 쏟아부으니 좀 더 버티겠지만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다만 한국이 일본과 갈등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메모리에서 중국, 비메모리에서 대만이 엄청나게 유리한 상황이 되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내부 비판보다는 내부 결속 중요
그는 인터뷰 말미에 꼭 한마디 덧붙여달라고 했다. "5G를 선도하면서 반도체까지 쥔 우리나라에서 4차 산업혁명 가장 먼저 일어나지 않으면 땅을 칠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가 대기업을 악(惡)이 아닌, 기술 패권을 지닌 중요한 존재로 보는 시각으로 바뀌는 계기가 돼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내부에서 비난과 비판보다 힘을 모아 함께 위기에 대응하는 한편으로, 국가 인재를 키울 때"라고 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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