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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여행' 용어 바뀌나…진보교육감들의 학교 속 일제 잔재 지우기 논란

중앙일보 2019.07.08 14:11
경기도교육청은 최근 모든 초·중·고교에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 발굴을 위한 조사' 공문을 보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일본 잔재로 '훈화' '파이팅(Fighting)' '수학여행' 등을 제시했다. 경기도교육청에 따르면 '훈화'는 상사가 부하에게 훈시한다는 일제 강점기 군대 용어다. '파이팅'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출진하면서 구호로 외친 '화이또(ファイト·fight의 일본식 발음)'에서 유래했다. 수학여행도 민족정신을 해하기 위해 조선인 학생들을 일본 등으로 보내던 것이 시작이라고 설명했다.  
경기도교육청이 각 학교에 보낸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 발굴을 위한 조사 자료 속 예시. [사진 경기도교육청]

경기도교육청이 각 학교에 보낸 '학교생활 속 일제 잔재 발굴을 위한 조사 자료 속 예시. [사진 경기도교육청]

경기도교육청은 학생과 교사를 대상으로 오는 12일까지 학교 속 일제 잔재를 발굴한다.
이 공문을 놓고 일각에선 "일상용어까지 무조건 일제 잔재라고 청산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경기도의 한 학교 교장은 "일제 잔재 등을 학생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는 것엔 찬성하지만, 교육청이 나서서 교가부터 용어까지 모두 바꾸라는 것은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기도교육청 관계자는 "실태조사 등은 학교 속 친일 잔재를 정확하게 파악하자는 의미이지 일방적으로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며 "제안된 내용 중 문제가 있다면 대토론회나 공청회 등을 통해 청산 여부를 검토하고 학교에도 권고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교육감들이 추진하는 '일제 잔재 청산' 사업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긍정적인 시선도 있지만 일본 잔재라는 이유로 무조건 배척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학교 속 일본 잔재 청산 얘기가 본격적으로 나온 것은 지난해 지방선거 이후다. 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이 3·1운동 100주년인 올해를 맞아 '일제 강점기 잔재 청산'에 나섰다. 
대표적인 것이 친일 작사·작곡가가 만든 '교가'다. 각 교육청이 교가 전수조사에 나섰고 일부 학교는 교가를 바꾸겠다고 했다. 이는 지자체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경기도와 경기 고양·여주시 등은 기존 지자체 노래 사용을 중단하고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있다.
 
일본식 학교용어 바꾸고 청산 조례도 만들어
강원도교육청은 '수학여행'과 '조회', '유치원' 등 학교 용어를 개선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올해 초부터 일제 잔재 청산에 대한 인터넷 신문고를 운영한 결과 '일제 잔재'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강원도 원주시의 한 교사는 "전교생을 운동장에 군대처럼 줄을 맞춰 서게 하는 '조회'도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라며 "방송조회로도 가능하다"고 제안했다.
강원도교육청이 운영하고 있는 학교 안 일제 잔재 청산 신문고. [사진 강원도교육청 홈페이지 화면 캡처]

강원도교육청이 운영하고 있는 학교 안 일제 잔재 청산 신문고. [사진 강원도교육청 홈페이지 화면 캡처]

춘천시의 한 학교 교감은 "일본 잔재인 '유치원'이라는 용어를 왜 아직도 쓰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지참', '공람', '익일' 등 일본식 공문서 용어부터 바꾸자는 의견도 나왔다. 
강원도교육청 관계자는 "제보된 내용 중 조치가 필요한 경우는 학교에 권고하고 다음 달 중 교육계 일제 잔재 청산 계획을 발표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제주도는 아예 학교 속 일제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조례를 만들었다. 지난달 20일 의회를 통과한 '제주도교육청 일제강점기 식민잔재 청산에 관한 조례안'이 그것이다. 교육감에게 교내 일제강점기 잔재에 대한 실태조사와 청산 지원 사업 등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례를 발의한 송창권 제주도의원(제주 외도·이호·도두동)은 "학생들에게 자주독립과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게 할 필요성이 있어서 조례를 제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제주교육청은 이 조례를 토대로 학교 내 친일인사 조형물과 일제 잔재가 묻은 교명·교가·교목 등을 없애고 교육적 활용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미래 100년 학교문화 바로 세우기' 계획을 수립, 추진하고 있다.
 
한 학교에 걸린 일본인 교장 사진. [사진 충남교육청]

한 학교에 걸린 일본인 교장 사진. [사진 충남교육청]

'역사성 무시' 반발에 사업 중단도  
교육청 중심의 일제 잔재 청산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크다. 학교의 역사성이나 자율성을 해칠 수 있고 예산을 동반하는 경우도 많아서다.
거듭된 반발에 일부 사업을 보류하는 교육청도 나오고 있다. 충북도교육청의 학교 내 일본식 향나무 제거 사업이 그렇다. 일본이 원산지인 향나무를 교목에서 제외하고 다른 나무로 교체하는 내용인데 교체 비용도 만만치 않고 환경문제 등을 고려해도 무조건 없애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현재 충북 학교와 교육기관에는 1400여 그루의 향나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충북도교육청은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난달 24일 정책토론회를 열었다. 그러나 반대하는 의견이 많아 사실상 계획을 철회했다.
 
오영록 충북교육청 민주시민교육팀 장학관은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의견수렴과 공론화를 위해 토론회를 열었으나 향나무 제거나 교가 변경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많았다"며 "지금 있는 향나무는 그대로 두되 교육용으로 활용하자고 결론이 났고, 교가는 학생과 학부모, 교사, 동문 등 의견을 들어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수원·춘천·청주=최모란·박진호·최종권 기자 m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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