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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밖에선 극일 앞장선 기업들, 안에선 얻어맞기 바빴다

중앙일보 2019.07.07 10:58 경제 2면 지면보기
1994년 9월, 일간지에 독특한 전면 광고 하나가 실렸다.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M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한민족 세계 제패, 월드베스트 정신으로 해냈습니다’라는 문구를 담은 광고에는 구한말 당시 태극기가 상단에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반도체·조선 등 세계일류 성과
국내선 기·승·전·기업때리기 제물
경제 발목잡는 정치 언제까지…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M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1994년 9월의 신문 전면 광고.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M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1994년 9월의 신문 전면 광고.

이에 앞서 삼성전자가 256M D램 개발에 성공한 것을 대외에 공표한 날은 1994년 8월29일이었다. 삼성전자가 발표일을 이날로 잡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일제의 만행 속 나라의 주권을 뺏긴 경술국치 84년째가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메모리 시장에서는 기술력으로 일본을 눌렀다는 극일(克日) 선언이었던 셈이다.
 
당시 김광호 삼성전자 사장은 "적어도 D램 기술에선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양국이 평등했던) 구한말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떠올렸다. 일본 언론도 삼성전자의 세계 최초 256M D램 개발에 대해 ‘일한(日韓) 역전’이라는 기사 제목을 달고 후발주자였던 한국이 반도체 기술력에서 일본을 추월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1994년 8월29일 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M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당시 중앙일보 지면.

1994년 8월29일 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M D램 개발에 성공했다는 내용을 보도한 당시 중앙일보 지면.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를 겨냥해 수출규제 조치를 발동했다. 대체재를 마련하기 힘든 핵심 소재를 골라 급소를 찌른 것이다. 특히 반도체는 한국 기업의 대표적인 극일 사례로 꼽힌다는 점에서 일본의 섬뜩한 속내가 엿보인다.
 
주요 지표를 살펴보면 일본은 많은 부분에서 한국을 앞선다. 국토면적은 3779만7100㏊로 한국(1002만9536㏊)의 3.8배, 인구는 1억 2685만명으로 한국(5171만명)의 2.5배다. 국내 총생산(GDP)은 한국(1조 6194억 달러, 2018년 기준)보다 3.2배 많은 5조1670억 달러로 세계 3위의 경제 강국이다. 1인당 GDP도 4만849달러로 한국(3만1346달러)보다 약 1만달러 많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이 평가한 국가경쟁력 순위도 일본은 5위로 한국(15위)을 앞선다. 여기에 최근에는 침략의 역사를 회피하며 ‘정상국가’라는 미명 아래 공격적인 군사태세까지 갖춰나가고 있다.  
 
그나마 한국이 일본에 ‘맞짱’을 뜰 수 있는 건 기업들의 경쟁력이다. 2000년대 우리 기업의 정보기술(IT)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삼성ㆍLG전자의 디스플레이ㆍTVㆍ휴대전화 등은 일본을 앞선다. 일본기업의 ‘제자’ 정도로 취급받던 포스코ㆍ현대중공업 등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철강ㆍ조선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현대차와 SKㆍLG 등도 자동차ㆍ석유화학 분야에서 일본이 얕잡아볼 수 없는 글로벌 메이커가 됐다.  산업 전체로 보면 우리가 일본을 추월한 분야보다는 여전히 따라잡아야 할 분야가 더 많긴 하지만, 한국 기업들은 지금도 일본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핵심 역량을 키우고 있는 중이다.
 
짚어보면 이번 일본 아베 정부의 한국에 대한 경제 ‘몽니’는 철저히 기업에 집중됐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하기로 한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3개 품목은 반도체ㆍ디스플레이ㆍ스마트폰의 핵심 부품이다. 이에 앞서 지난해 11월에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슈와는 연관이 없는 한국 정부의 조선업계 공적 지원 문제를 끄집어내며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일본 기업과 거래하는 한국 기업들의 통관이 늦어지고, 결제가 지연되는 등의 피해를 봤다는 소식도 들린다.
 
일본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추가 제재를 준비하고 있다. 다음 달 거의 모든 물품을 규제하는 ‘캐치올(catch all) 규제를 발동하면 식료품과 목재를 제외한 거의 전 품목이 해당하기 때문에 수출 규제 영향을 받는 국내 기업의 수가 크게 불어날 수 있다.  
 
대표적인 '일본통' 학자로 꼽히는 박명섭 성균관대 글로벌경영학과 교수는 “이번 조치를 보면 일본 정부와 전문가 집단이 오랜 기간 머리를 맞대 한국 산업의 취약점을 찾아내고 규제를 단행한 것 같다”며 “이미 일본이 구상한 여러 가지 단계별 시나리오 안에는 반도체ㆍ디스플레이 외의 다른 산업에 대한 핵심 소재ㆍ부품의 수출을 규제하는 등 제2, 제3의 경제 보복이 들어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규제 수위가 더 올라갈 경우  한국의 피해가 산업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이번 일본의 수출 규제가 산업ㆍ경제적 논리가 아닌 정치ㆍ외교적 논리에 의해 촉발됐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개별 기업이 대책을 마련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업들의 한숨은 깊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정부는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 정부가 여러 차례 보복을 예고했고, 일본의 움직임이 국내외 언론은 물론 기업ㆍ전문가들로부터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되려 정부의 한 간부는 삼성ㆍSKㆍLG 등의 임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기업들은 일본에 지사도 있고 정보도 많을 텐데 사전 동향을 파악하지 못했느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증폭됐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기업 부사장은 “정부가 최근까지도 ‘지배구조가 문제다’, ‘근로조건을 개선하라’, ‘고용을 늘려달라’, 투자를 확대하라‘ 등 기업을 몰아붙이더니 정작 이번 위기 상황에서는 현실적인 방향제시도 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소연했다.
 
그간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는 기술력 높은 일본 기업들과 경쟁을 벌이며 극일의 ‘선봉’에 섰지만, 국내에서는 되려  ‘적폐청산’, ‘경제민주화’라는 미명하에 끝없는 기업 배싱(bashing, 때리기)에 시달려왔다. 정부는 법인세를 내리는 다른 경쟁국들과 달리 한국만 법인세 최고 세율을 인상하는 ‘역주행’을 펼쳤다.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 정규화 등으로 기업의 부담을 늘려왔다. 여기에 검찰ㆍ경찰ㆍ공정거래위원회ㆍ고용노동부 등 범 사정 당국은 경쟁적으로 기업들을 옥죄고 있고, 현 정부 출범에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강성노조는 잇단 파업으로 경영의 발목을 잡고 있다.  
 
반면 그간 재계에서 요구해온 규제혁신은 제자리걸음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주요 기업인과 정ㆍ관계 인사들이 모여 새해 각오를 다지는 경제계 신년인사회에 2년 연속 불참하는 등 ‘기업 패싱’ 분위기도 여전하다. 정치권에서는 중소 협력업체가 이익을 나누는 협력이익공유제 법제화, 상법ㆍ공정거래법 개정 등 기업 부담을 늘릴 법안이 산적해 있다. 기업이 ‘극일’을 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지원해도 모자랄 판에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기ㆍ승ㆍ전ㆍ기업 때리기’를 이어왔다. 최근 “이제는 제발 정치가 경제를 좀 놓아주어야 할 때 아닌가”라는 최근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의 발언이 무겁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인공지능(AI)과 바이오 등 차세대 기술 경쟁이 치열해지는 세계 경제 여건에선 기업의 기술경쟁력은 곧 ‘국력’을 뜻한다”며 “과감한 규제개혁과 경영환경 개선을 통해 기업들이 더 힘을 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진정한 '극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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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손해용 기자 sohn.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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