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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락의 한반도평화워치] 외교 좌표 설정하지 않으면 주변 강대국들에 휘둘린다

중앙일보 2019.07.05 00:02 종합 26면 지면보기
전환기 한국 외교의 길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미·중 관계가 사상 최악이다. 미·러 관계도 탈냉전 이래 최저점이다. 중·러는 유례없는 공조를 과시하고 있다. 이 현상은 굴기하는 중국과, 위상을 재정립하려는 러시아, 이에 대응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빚어낸 것이다. 더구나 지금의 미국은 자국 우선을 내세우며 동맹을 경시하는 비전통적인 지도자가 이끌고 있다. 현 상황은 한국처럼 미국의 동맹이면서 중·러와 인접해 있고, 중국에 심한 경제 의존도를 가진 나라에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미·중, 미·러 대립 구도 속에서
한국 국익 상반되는 요구 심화
최적의 외교 좌표 설정한 뒤
정책 견지해 일관성 축적해야

역사적으로도 우리 주변 주요국 간의 대립은 한반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소 냉전이 단적인 예다. 분단과 6·25, 한·미 동맹으로부터 군사 정권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큰 고비를 냉전과 떼어서 해석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향후 우리 역사도 외부 도전에 큰 영향을 받을 터이니 우리의 대응이 중요할 것이다.
 
역사적 경험과 전망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에는 주요국 간의 대립 구도 속에서 적극적으로 대응 방향을 모색하려는 인식이 적다. 오히려 회피하고 안주하려는 관성이 강하다. 지난 수십 년간 중국의 부상이 미·중 대립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였음에도, 우리는 미·중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정립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미뤄왔다.
  
회피적 대처의 폐해 드러나
 
대미, 대중 정책을 전략적으로 통합하여 다루지 않고 별개로 대했다. 대중 무역이 흑자였으므로 방임을 국익으로 여겼다. 과도한 대중국 경제 의존이 방치되었다. 미·중 사이에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호하게 처신하였다. 선택이 불가피해지면 압력의 정도에 따라 편의적으로 대처하는 일이 많았다.
 
대표적 사례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였다. 사태 초기 중국 외교부장이 공개적으로 우리 외교부 장관에게 한국이 신뢰를 저버리고 있다고 맹비난한 일이 있었다. 우리 측은 응대를 피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그간 편의적으로 대처하다가 책 잡힌 게 있구나 싶었다. 이후 중국은 비난 성명과 언급을 수없이 내놓았으나, 우리는 제대로 된 성명 하나를 내지 않았다. 중국이 엄청난 보복을 해도 무대응으로 일관하였다.
 
유사 사례는 러시아에 대해서도 많다. 우리가 미국을 어렵게 설득하여 한국이 개발할 수 있는 미사일의 사거리를 연장한 일이 있었다. 기존 미사일 협정이 사거리를 지나치게 제한한 나머지 우리 미사일이 북한의 후방에 미치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는 미국이 한국의 미사일 역량을 키워 러시아를 겨냥하는 미사일 방어에 동원하려는 것으로 곡해하였다. 사거리가 러시아에 미치지 않는 대북 억지용일 뿐임을 설명했으나, 러시아의 편견은 완고하였다. 결국 러시아는 사거리 연장 합의를 미국의 미사일 방어와 연계하여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러시아의 성명은 사실과 다르고 방치하면 추후 악재가 될 것이므로 우리 입장을 밝혀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서울은 침묵하였다.
  
푸틴 “한국은 주권적 결정 못 내려”
 
이런 현상은 최근에도 이어지고 있다. 미·중이 무역 전쟁 와중에서 여러 이슈를 두고 각기 우리를 압박하고 있으나 우리는 회피적으로 대하고 있다. 지난 4월 북·러 정상회담을 마친 푸틴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가스관과 철도 연결에 대해 언급하면서 한국에 대해 이상한 발언을 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스관·철도 연결이 한국에 이득임에도 한국은 주권적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며 “한국은 미국의 동맹으로서 의무가 있는 것 같고, 이 사업들이 중단되었다”고 하였다. 한국이 미국 눈치를 보아 주권 국가로 처신하지 못한다는 인식을 표한 것이다.
 
사실 가스관과 철도 연결 사업의 결정적 장애 요인은 경제성이다. 막대한 투자에 비해 기대 이익이 아주 낮다. 미국 때문이 아니다. 러시아 대통령이 사실도 아니고 한국의 이미지에 해가 되는 공개 언급을 했음에도 우리는 아무 입장도 내놓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한국 특유의 이유가 있다. 만일 우리가 중·러에 대해 적극 대응을 하면 이들은 미·일보다 거친 맞대응을 할 것이다. 논란이 심화하면 정치권과 언론은 정부가 외교를 잘못하였다고 공격하게 된다. 그러니 관료들은 국익보다 분란을 키우지 않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때 정권을 잡은 엘리트가 나서서 관료를 감독해야 마땅하나, 집권 엘리트마저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 쪽으로 정치적 판단을 하면 어찌할 수 없게 된다. 전형적인 외교 후진국형 논의 구조다.
 
이런 국내적 환경 속에서 미·중, 미·러 대립 구도를 헤쳐나갈 정책 방향을 정립하는 작업이 동력을 얻기 어렵다. 모두 어려운 일을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정책 방향은 없고 연미화중(聯美和中) 부류의 원론적 구호만 남아 주술처럼 복창되는 일이 벌어진다. 주술이 해법이 되는 분위기에서 좋은 처방이 나오기 어렵다.
  
편의적 외교, 주변국 압박 불러
 
그러나 점점 이대로 가기는 곤란한 상황이 오고 있다. 심화하는 미·중, 미·러 대립 구도 속에서 미국과 중·러는 상반되는 요구를 더 빈번히 더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우리가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대처할수록 상대는 압박이 통한다는 인식을 강화할 소지도 커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기본적인 정책 방향을 정립하고 이것을 각인시켜 모두가 기대치를 조정하게 하는 게 낫다. 그래야 덜 휘둘린다. 그러려면 우선 한·미 동맹과 일본·중국·러시아와의 파트너십을 고려하여, 어느 지점이 가장 균형 있고 유지 가능한 최적의 좌표인지를 찾아야 한다. 그 좌표로부터 일정한 정책 방향을 설정하고 이를 견지함으로써 일관성을 축적해야 한다.
 
아시아 국가 중 미·중, 미·러 대립 구도 속에서 방향성을 갖고 대처하는 사례가 여럿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북한은 확고한 방향을 갖고 강대국과 거래에 임하고 있다. 베트남도 그중 하나다. 일본·호주·인도는 인도·태평양정책이라는 틀에서 미국과 함께하면서도 각자 입지와 이해에 따라 다른 정책 방향을 갖고 있다.
  
기본 방향 정립해야 입지도 강해져
 
이들처럼 우리도 나름의 방향을 정하는 것이 좋다. 예컨대 미국이 3시 방향을 기대하고 중국이 9시 방향을 주문할 때, 한국은 기본적으로 1시 반 방향의 대처를 하는 나라임을 인식시키는 식이다. 이미 일본·호주·인도는 3시로부터 12시 사이에서 각기 조금씩 다른 방향을 취하고 있다. 해서 안 될 일은 3시 방향, 9시 방향을 오락가락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현재 진행 중인 한반도 비핵 평화 협상 과정에서 우리의 입지도 강화될 것이다. 이 협상도 당연히 주변 주요국 간의 역학에 영향을 받는다. 주요국 간 역학이 거시적 환경이라면 한반도 비핵 평화는 그 구도 아래의 현안이다. 거시적 환경에 대처할 방향성 없이 강대국과 함께 현안을 다루다 보면 휘둘리거나 소외되기 쉽다. 북한이 이점을 악용할 수 있다. 최근 시진핑 방북,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트럼프 방한, 판문점 북·미 정상 회동 과정을 보면서 더욱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이처럼 주변 주요국 간의 대립 구도에 대처할 기본 방향을 정립하는 일은 긴요하고 유용하다. 그런데 이 작업은 시작하기 어렵다. 정부에만 주문하기에는 무리다.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 사회 전반에 퍼져야 한다. 정치권·언론·외교안보 전문가 모두가 합력하여 정부의 방향 정립을 고무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우리가 거시적 환경에 대응할 길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강대국 간 역학의 결과물을 우리의 역사로 감수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더 미루지 말아야 한다.
 
위성락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리셋 코리아 외교안보분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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