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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대째 이어온 조선 도공의 후예 ‘심수관가’에 가보니

중앙일보 2019.07.04 07:00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25)
지난 6월 14대 심수관이 별세했다. 그는 한일 문화교류에 앞장서며 한국 정부를 비롯한 유수의 기관에서 직함 등을 부여받았다. [중앙포토]

지난 6월 14대 심수관이 별세했다. 그는 한일 문화교류에 앞장서며 한국 정부를 비롯한 유수의 기관에서 직함 등을 부여받았다. [중앙포토]

 
2019년 6월 16일. 14대 심수관(본명 오사코 게이키치(大迫恵吉))이 9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이 소식을 서울에서 들었다. '도고 시게노리(東郷茂徳) 기념관'에 대한 글을 마감하고 '심수관가'에 대한 초고를 마친 상태였다. 인연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6월 초 심수관가를 방문하지 않았다면 14대 심수관의 별세 소식은 그저 하나의 뉴스에 불과했을 것이다.
 
심수관(沈壽官·친주칸)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2018년 6월 도쿄의 한국문화원에서 열린 한·일 국교 정상화 53주년 기념 특별전에서였다. 전시회를 본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마침 『토지』의 일본어판 번역 출판기념회가 한국문화원에서 있었다. 출판기념회에 동행한 친구가 꼭 보여주고 싶은 전시회가 있다며 나를 안내했다. 일본에서 나고 자란 친구는 어렸을 때부터 '친주칸'이란 이름을 자주 들으며 자랐다고 했다.
 
전시장을 돌며 정교한 디자인과 만듦새에 그저 놀라고 놀랐지만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 놀라움은 기억 속으로 잠겨가고 있었다. 그런 즈음 나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일본편1 규슈』에서 심수관가의 역사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알면 보이듯 알고 나니 현장에 가보고 싶어졌다. 더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심수관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이, 사진이 아닌 실물이었다는 것은 큰 행운이었다.
 
심수관가 정문에 있는 돌하르방
심수관가 역대 수장고 입구. 단아한 모습이다. 심수관가의 대표적인 작품이 전시 중이다. [사진 양은심]

심수관가 역대 수장고 입구. 단아한 모습이다. 심수관가의 대표적인 작품이 전시 중이다. [사진 양은심]

 
지난 6월 4일. 친구 둘과 함께 심수관가를 찾았다. 정문을 들어서니 갑자기 제주도의 돌하르방이 서 있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왜지? 제주도 사람 아닌데?" 그 대답은 도록을 보고 알게 되었다. 14대 심수관은 2003년에 제주도 명예시민이 되었고 '대한민국 제주도 국제 자유도시 명예 홍보대사'로 취임했다. 제주도 출신인 나는 점점 더 인연을 느끼며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정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니 소박하고 큰 항아리들이 놓여 있었다. 건물은 일본식인데 한국을 느끼게 했고 편안했다. 조선 도공의 후예들이 일본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절묘한 조화였다. 1980년에 완성된 '심수관가 역대 수장고'에는 심수관가의 역사에 대한 설명과 역대 작품들이 진열 중이다. 촬영금지였기에 오히려 집중할 수 있었다. 전시실 바닥에까지 눈이 갔다. 작품도 작품이려니와 타일 같은 까만 벽돌을 깔아놓은 전시실 바닥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나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것은 초대 심당길(沈當吉)이 조선에서 끌려올 때 가지고 왔다는 탈이다. '조선의 탈.' '탈'하면 해학적인 얼굴을 떠올리게 되는데 위엄을 느끼게 하는 얼굴이었다. 위엄은 있으나 무섭지는 않은 게 인상적이었다.
 
돌하르방이 있는 풍경의 모습. 제주도 출신인 나를 놀라게 했다. 14대 심수관은 2003년에 제주도 명예시민이 되었고 '대한민국 제주도 국제 자유도시 명예 홍보대사'로 취임했다. [사진 양은심]

돌하르방이 있는 풍경의 모습. 제주도 출신인 나를 놀라게 했다. 14대 심수관은 2003년에 제주도 명예시민이 되었고 '대한민국 제주도 국제 자유도시 명예 홍보대사'로 취임했다. [사진 양은심]

 
무사에 상당하는 대우를 하며 철저하게 조선의 도공들을 보호했다는 시마즈(島津) 번(藩)의 지도자들. 도공들이 살았던 나에시로가와(苗代川)는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코리아타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 이름과 의복과 언어가 보장되고 보존되었다고 한다.
 
역대 작품을 본 후 판매장을 겸하고 있는 작품 전시장으로 갔다. 친구가 그렇게 오고 싶어 했으니 기념으로 하나 사라고 부추긴다. 굽이 가고시마의 특산품인 '사쿠라지마 무'로 돼 있어 보고 있으면 저절로 미소 짓게 되는 컵을 골랐다. 친구도 사겠다며 같은 것을 골랐다. 재고가 없어 7월 중순에 보내 준단다. 손님이 우리밖에 없어서인지 차를 내 온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계산대에 소설책이 놓여 있었다.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가 쓴 『어찌 고향이 잊히리오(故郷忘れじがたく候)』였다. 시바 료타로와 14대 심수관은 돈독한 우의를 다지며 교류를 이어갔다고 한다. 『어찌 고향이 잊히리오』의 해설을 먼저 읽었다.
 
심수관의 작품. 우아한 도자기의 선과 세밀한 그림이 탄성을 자아낸다. [중앙포토]

심수관의 작품. 우아한 도자기의 선과 세밀한 그림이 탄성을 자아낸다. [중앙포토]

 
1966년 14대 심수관이 서울대학 대강당에서 한 말로 시작한다.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저는 370년을 말해야만 합니다." 38살의 젊은 나이에 14대 심수관을 계승(1964년)한 조선 도공의 후예. 그가 눈물을 떨구며 한국의 청년들에게 호소했다고 한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마치 강당 구석에 '제 남편과 아들은 일본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여인이 서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1966년이었다.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
 
그 연설은 한국의 청년들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그로부터 50여 년이 지났다.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400여 년 전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 심당길의 후손들은 일본에 뿌리를 내렸고 조선의 도자기를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발전시켰다. 조선의 후예임을 잊지도 않았고 숨기지도 않았다.
 
15대째 이어오는 심수관가
수장고 양옆으로 진열된 항아리(위) 검은 항아리가 있는 정원(아래). 한국의 뒤뜰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사진 양은심]

수장고 양옆으로 진열된 항아리(위) 검은 항아리가 있는 정원(아래). 한국의 뒤뜰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사진 양은심]

 
심당길을 포함한 17성 80여 명의 조선 도공의 후손들은 지금도 '조선의 땅에 36년이란 원한의 세월을 심은 일본'에서 살아가고 있다. 개명하고 귀화했다 해도 후손임에는 다름이 없다. 일본인이 되었다고 해서 나와 상관없다는 말은 말자. 남의 집에 시집간 딸이 내 딸이 아닌 것은 아니듯 말이다.
 
별세 소식을 접한 후 '14대 심수관은 지금의 한·일 관계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라고 자꾸 생각하게 된다. 13대 심수관은 14대 심수관에게 "네 아들을 도공의 길로 이끌라"고 했다 한다. 1999년 14대 심수관의 아들 심일휘는 15대 심수관을 계승했다.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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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심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필진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 일본인과 결혼해 도쿄에 살림을 꾸린지 약 25년. 일본으로의 이주는 성공적이라고 자부한다. 한일자막 번역가이자 작가이며,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다. ‘한일 양국의 풀뿌리 외교관’이라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한국보다도 더 비빌 언덕이 없는 일본에서 그 사회에 젖어 들고, 내 터전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연재한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과 같은 이야기가 독자의 삶에 힌트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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