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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의 공존의 문명] 중앙아시아 르네상스를 꽃피운 티무르

중앙일보 2019.07.04 00:16 종합 27면 지면보기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티무르 제국(1370~1507)의 창시자 티무르만큼 엇갈리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승자에게는 성군이고 패자에게는 폭군이 되는 역사평가의 속성 때문이다. 그는 서구에서는 ‘태멀레인(Tamerlane)’ ‘절름발이 티무르’로 불리면서 살육자나 문명 파괴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렇지만 제국의 중심지였던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아미르 티무르(티무르 대왕)’로 크게 추앙받고 나라 전체에 그의 동상과 초상이 즐비하다.
 

능력별 인재등용 학문숭상
실크로드 활성화에 기여
세종대왕과 티무르제국간
과학기술 교류했을 수도

130여 년의 짧은 존속기간이었지만 티무르 제국은 몽골을 이어 중앙아시아 전역을 통일한 대제국으로 동서 실크로드 활성화에 크게 기여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티무르는 인도 북부와 카스피해 남부를 거쳐 1402년에는 앙카라 평원에서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예지드(Bayezid) 1세를 격퇴하고 그를 생포했다. 다행히 티무르 군대가 회군함으로써 오스만 왕정은 존속할 수 있었다. 1405년 2월 티무르가 20만의 대군으로 명나라 원정을 감행하던 중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명의 운명도 바뀌었다.
 
1403년 완공된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묘당인 구르 아미르. [사진 이희수]

1403년 완공된 사마르칸트의 티무르 묘당인 구르 아미르. [사진 이희수]

티무르 제국은 정치적으로는 칭기즈칸의 몽골을 계승하고 종족적으로 투르크인, 문화적으로는 페르시아,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을 표방한 진정한 다문화 공존국가였다. 능력 위주의 인재발탁으로 국가운영은 유연성을 더했고, 학문 숭상 정책으로 학자가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지하 수로인 카나트 정비를 통해 대규모 관개시설을 구축하여 농업과 실크로드 상업의 결합, 과학과 학문의 장려, 예술과 건축의 부흥, 이슬람과 토착 종교의 융합이라는 중앙아시아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하게 열어주었다. 국력에 걸맞게 모스크, 묘당, 대학인 메드레세, 목욕탕 하맘, 바자르 등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도시 전체를 채웠다. 주름 잡힌 에메랄드빛 둥근 돔에 상감한 푸른색 타일로 벽면을 장식해서 우아하면서도 품격있는 티무르식 건축 장르를 선보였다. 최대한 높게 올린 모스크의 첨탑은 실크로드 대상들을 위한 사막의 등대 역할을 했다.
 
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트에는 전 세계 상인들과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공식행사가 치러지고 왕의 칙령이 공표되던 레기스탄 광장에는 궁전이나 성채가 아닌 수백명의 학생들이 수학하던 학문의 전당인 메드레세가 들어섰다. 특히 티무르의 손자 울루그벡(1393~1449)이 완성한 천문대는 뛰어난 기술과 학문적 집적으로 당시 1018개의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측하여 기록했다고 전한다. 정교한 관측을 바탕으로 울루그벡은 1년의 길이를 365일 6시간 10분 9초로 계산했다. 현재의 계산과 1분 이내의 오차범위였다. 세종시대 과학기기나 천문역법이 이슬람 역법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 사료로 확인되고 있는 상황에서 세종과 동시대 티무르제국 간의 과학기술 교류를 밝히는 것도 향후 중요한 연구과제로 남는다.
 
티무르 건축예술의 위대성은 그의 묘당 ‘구르 아미르’에서 숙연한 빛을 발한다. 특히 64개의 주름으로 마무리한 돔 건축은 미의 극치에 이르렀다. 실내에는 화려함과 고귀함, 당당함을 한 건축에 모두 품고 완벽한 기하학적 대칭 구도로 신의 세상에 영면하는 상징을 표현해 놓았다. 1층에 있는 석관들은 가묘이고, 진짜 묘는 바로 5m 지하에 감추어져 있었다. 250년 뒤 선보일 인도 타지마할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티무르의 검은 대리석 석관은 그의 유언에 따라 스승이었던 사이드 베레케티의 발치에 더욱 작은 크기로 안치되었다. 그는 죽어서까지 자신의 스승을 흠모하며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심혈을 기울인 통치자로 남았다. 티무르는 당대 최고의 석학들인 모로코의 이븐 바투타나 이란의 하페즈에브루 등과도 교류했다.
 
유럽중심주의와 중화(中華)의 역사관에서 중앙아시아 유목 공동체에는 축적된 문화나 지식의 하부구조가 미약하다는 고정관념과 오류를 티무르가 깨뜨려 주었다. 오히려 중국 문명이나 서쪽의 오리엔트와 그리스·로마·비잔틴 문명을 온몸으로 받아들여 15세기에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과 과학기술을 이루고 이를 가장 역동적으로 주변 지역으로 전파해 주었다. 티무르의 마지막 왕자인 바부르가 권력 투쟁에 밀려 인도 북부로 가서 무굴제국의 창시자가 됨으로써 티무르는 인도에서 또 다른 400년의 명맥을 이어갔다.
 
이희수 한양대 특훈교수·중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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