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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소만 노렸다" 치밀한 日···"별거 있겠냐" 허 찔린 韓

중앙일보 2019.07.04 00:03 종합 2면 지면보기
자민당 총재인 아베 신조 총리가 3일 일본기자클럽 토론회에 참석해 참의원선거(21일) 슬로건인 ‘정치의 안정’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가 발효되는 오늘(4일)은 일본 여당이 필승을 목표로 선거운동을 시작하는 참의원 선거 공시일이기도 하다. [EPA=연합뉴스]

자민당 총재인 아베 신조 총리가 3일 일본기자클럽 토론회에 참석해 참의원선거(21일) 슬로건인 ‘정치의 안정’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 조치가 발효되는 오늘(4일)은 일본 여당이 필승을 목표로 선거운동을 시작하는 참의원 선거 공시일이기도 하다. [EPA=연합뉴스]

“대법원에서 결정이 났는데, 어쩔 수가 없지. 원고들 그 불쌍한 사람들이 없는 살림에 돈 모아서 어떻게든 재판해 이긴 건데, 어떻게 정부가 나설 수가 있겠나.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이 현금화돼 난리가 나고, 일본이 보복조치를 해도 어쩔 수 없어. 오히려 이런 난리를 거쳐야 해결의 실마리가 생길 수도 있지….”
 

한국과 접촉 많은 외무성 배제
‘WTO 예외’ 안보 명분 찾아내
한국 가장 아픈 품목 골라 타격

“대법 판결에 정부 못 나선다” 입장
일본이 거절한 기금안 재차 제안
격앙된 아베 정부 보복 실행 옮겨

지난 2월 중순 한·일 외교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던 정부 고위 인사가 털어놓은 얘기다. 당시엔 대법원 강제 징용 판결이 일본 기업 자산 압류로 번지면서 한·일 간 갈등이 더욱 고조됐을 때였다. 하지만 이 고위 인사가 털어놓은 한국 정부의 인식은 “일본이 대항조치를 한다고 하더라도 뭐 별거 있겠는가”라는 수준이었다.
 
일본은 달랐다. 칼을 갈고 있었다.
 
“한국은 일본을 약하게 보고 중국만 무서워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이다. 모든 카드를 늘어놓고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독이 잔뜩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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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한·일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일본 측 인사가 전한 당시 정부 내 기류였다. 일본은 민첩하게 움직였다.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최종안은 5월 중에 대부분 완성됐다”는 요미우리의 보도대로다.
 
한 소식통은 “아베 내각의 실세로 통하는 경제산업성 관료 출신 이마이 다카야(今井尙哉) 정무비서관의 작품이라는 게 일본 정가에선 정설”이라고 했다. 이마이는 1차 아베 내각에서부터 아베 총리를 보좌한 핵심 중의 핵심 측근이다. 관저로 통하는 모든 정책, 아베 총리가 해야 하는 모든 정무적 판단에 그가 관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마이와 그의 출신 부처인 경제산업성은 치밀한 시나리오를 다듬었다. 한국이 가장 아파할 반도체와 스마트폰을 정밀 타격 지점으로 선택했다. 명분으로 내건 것은 ‘안전 보장’이었다. 안전보장상 필요하다면 예외적으로 무역 규제를 허용하고 있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의 애매한 공간을 파고들었다. 안보우호국들에 무역 심사와 관련된 특혜를 제공하는 ‘화이트(백색) 국가’에서 한국을 빼는 조치도 교묘했다. 일본이 내세운 ‘안전보장’이란 명분에도 맞고, 추후 한국 기업의 대응에 따라 수출 규제 대상을 무궁무진하게 확대할 수도 줄일 수도 있다. 한국을 입맛대로 압박할 수 있는 절묘한 한 수를 찾아낸 셈이다.
 
'대화파' 외무성 뒤 '충성파' 경산성이 한국 때릴 준비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일본 측이 무산시킨 것은 전술적 일관성을 고려한 차원으로 보인다. 수출 규제 발표가 내부적으로 예정된 상황에서 아베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머리를 맞댈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 외무성은 마지막까지 “서서 잠시 대화를 나눌지, 악수를 길게 할지, 잠깐 앉아서 할지 정해진 게 없다”고 연막을 쳤고, 결과적으로 한국을 우왕좌왕하게 했다.
 
일본은 또 한국 정부와 얼굴을 마주하는 외무성이 아니라 일본 내에서 ‘무조건 충성집단’으로 통하는 경제산업성을 통해 한국의 급소를 찍었다. 외무성에서 흘러나오는 유화적 제스처에 마음을 놓고 있던 한국엔 그래서 더 날카로운 비수가 됐다. 한국에선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지난달 28일 고노 다로(河野太郎) 외무상을, 앞서 지난달 19일엔 조세영 1차관이 도쿄로 급파돼 아키바 다케오(秋葉剛男) 외무성 사무차관을 면담했지만 보복조치에 대한 낌새도 전달받지 못했다고 한다.
 
일본은 1일 보복 조치 발표 이후 철저하게 ‘원 보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장관의 브리핑부터 사석에서 만나는 중간 책임자들끼리 “안전보장을 목적으로 수출관리를 적절히 하기 위한 조치” “한국과는 신뢰관계가 손상돼 수출관리가 곤란해졌다”고 앵무새처럼 매일 반복하고 있다. “일본의 수출 규제는 징용 판결에 대한 경제 보복이다”(성윤모 산자부 장관), “(강제 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이라는 것은) 언론의 해석인데, 마치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처럼 가정해 저희가 말씀드리는 건 적절치 않다”(청와대 관계자)며 다른 뉘앙스로도 들릴 수 있는 한국 정부와는 대조적이다.
 
"급조된 강제징용 대책 발표가 기름 부어"
 
양국 소식통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지난달 19일 발표한 징용 문제 관련 대책은 결과적으로 아베 총리가 보복 조치를 강행하는 명분이 됐다. 한국 정부는 그동안 1965년 청구권 협정에 기초한 일본 정부의 외교협의와 중재위 설치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중재위 설치와 관련된 답변 시한(6월 18일)을 하루 넘긴 19일 ‘한·일 양국 기업이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대법원 판결 8개월 만에 처음 내놓은 안이었지만, 사실은 앞서 일본이 이미 거절했던 방안이었다. 일본 총리관저는 격앙됐다. 당초 아베 총리는 지난 5월 완성된 한국 수출 규제안을 빨리 시행하라고 재촉하는 입장이었다.
 
이 같은 총리관저의 강경한 분위기 속에서 “G20 때까지라도, 조금만이라도 더 기다려 보자”며 아베 총리를 설득한 이가 ‘마지막 남은 온건파’로 통했던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가 징용 대책안을 내놓은 뒤엔 스가 장관도 더는 아베 총리를 막아설 수가 없었다. 스가 장관은 주변에 “무너지는 둑을 더는 막지 못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서울=이유정 기자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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