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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 탈출 희망 잃은 자녀들…‘힘없는 부모’들이 더 위험하다

중앙일보 2019.07.04 00:02 종합 4면 지면보기
위기의 가족 범죄<상>
자식이 부모를 살해한 존속살해 사건을 들여다보면 경제적으로 빈곤하거나 병에 시달리는 등 어려운 처지에 놓인 부모들이 화를 입는 경우가 많다. ‘힘없는 부모’가 가족 간 범죄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지난 5월 21일 수원시 권선구의 한 주택에서 50대 남성 A씨의 부패한 시신이 발견됐다. 그런데 이 집에는 A씨의 시신만 있던 게 아니었다. A씨의 아들(26)도 살고 있었다. 아들은 경찰 조사에서 “지난해 말 아버지와 술을 마시다 말다툼을 했고, 흥분한 상태에서 주먹 등으로 아버지를 때렸다”고 진술했다. 무려 5개월 동안 아버지의 시신을 화장실에 방치한 채 집에 머무른 것이다. 경찰은 존속살해 혐의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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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그가 왜 아버지를 살해하고 방치했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다만 경찰에 따르면 이들 부자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빈곤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대구시 자택에서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에게도 흉기를 휘두른 B씨는 체포된 뒤 “가족 부양에 대한 부담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B씨의 아버지는 만성 신장병을, 어머니는 유방암을 앓고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던 B씨는 평소 주변에 금전적 부담을 호소했고, 우울증도 있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빈곤의 굴레에 갇힌 가정에서 연로하고 힘없는 부모들이 분노의 표적이 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제적 여유가 있거나, 앞으로 나아질 희망이 있는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 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갈등이 봉합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상황이 나아지기 어려운 빈곤 가정 등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불만이 약자인 부모에게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성인이 돼서도 부모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일부 자녀들의 행태가 가족 간 범죄의 씨앗이 된다는 지적도 있다.  
 
치솟는 집값, 과도한 결혼·교육 비용 등을 감당하지 못해 부모에게 손을 내밀었던 자녀들이 부모가 은퇴한 뒤에도 계속해서 손을 벌리면서 충돌이 생긴다는 것이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대외협력팀장은 “젊은 자녀들보다 오히려 사회의 중추라 할 수 있는 중·장년층 자식들이 노년층 부모에게 악감정을 가지거나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특히 자신의 어려운 처지가 부모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자녀들이 힘없는 부모를 상대로 분노를 쏟아내듯 극단적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꽤 있다”고 말했다.
 
서구보다 부모와 자식의 접촉이 많은 한국의 문화가 가족 간 범죄에 영향을 미친다는 분석도 나온다. 장성한 자녀가 독립하지 않고 부모와 함께 살거나 경제적 지원, 부양 등을 이유로 부모와 접촉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갈등 또한 늘었다는 것이다. 배상훈(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 프로파일러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가정보다 자식과 부모가 지나치게 밀착된 가정에서 오히려 심각한 범죄가 발생하곤 한다”며 “단지 물리적인 거리뿐 아니라 자식 혹은 부모를 책임져야 한다는 정신적 굴레에 묶인 가정에서 다양한 갈등이 폭발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말했다. 그는 “극단적인 갈등을 막으려면 부모와 자녀 모두 사적인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손국희·남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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