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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아직도 기생을 깎아내리나

중앙일보 2019.07.02 00:21 종합 27면 지면보기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100년 전 3·1운동 때의 얘기다. 서울 장안의 이름난 요릿집 명월관(明月館)에는 우국지사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한국인 셋만 모여도 일경(日警)이 눈을 부라리던 시절, 요릿집은 비교적 출입이 자유로웠기에 독립지사들은 명월관을 연락 장소로 사용했다. 인력거꾼 중에는 고학생이 많았고, 그들은 애국지사들의 연락책으로도 활동했다. 간혹 기생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우리 춤·노래 지켜온 종합예술인
3·1운동 때는 독립운동에도 가세
문화 각계서 재평가 움직임 일어

당대 명월관의 최고 기생 이난향(1900~79)은 반세기 전 이렇게 돌아봤다. “돈을 물 쓰듯 하거나 전직이 높다고 기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애국을 알게 된 기생들의 귀에도 독립만세의 여운이 감겨 있어 애국지사나 우국청년을 따르는 이른바 사상기생들이 생겨나게 됐다.” (중앙일보 71년 1월 18일자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올 2월 개봉한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에도 독립만세를 외치다 투옥된 수원 기생 김향화의 일화가 나온다.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기생을 재조명했다.
 
지난 토요일 오후 전북 정읍시 고택문화체험관(구 권번문화예술원)에 이난향의 가곡(歌曲) ‘초당 뒤에’가 느릿느릿 흘렀다. 관현악 반주와 함께 부르는 가곡은 조선시대 생긴 전통 성악곡이다. ‘초당 뒤에 와 앉아 우는 솥적다 새야~~객창(客窓)에 앉아 우는다 저 솥적다 새야~.’ 때마침 처마 밑으로 뚝뚝 듣는 가는 장맛비와 어울린 이난향의 유성기 목소리가 애달프고 구성졌다.
 
이날 행사는 국악평론가 김문성씨가 진행했다. ‘예기들의 흔적은 찾아서’를 주제로 한 인문학 강좌다. ‘권번의 음악을 말하다-서울·평양의 예인들’이 3시간 동안 펼쳐졌다. 지금까지 술과 웃음 등 값싼 이미지만 도드라진 옛 예인들의 명예회복을 시도했다. 권번(券番)은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기생조합을 말한다. 지난 20여 년 권번에서 일한 예인 100여 명을 직접 만난 김씨의 특강은 기생을 둘러싼 편견을 깨기에 충분했다. 노래와 춤은 물론 시서화(詩書畵)를 익히고 각종 예법도 배운 종합예술인 기생을 되살려냈다.
 
서소문 포럼 7/2

서소문 포럼 7/2

예컨대 기생이 되려면 평균 3년의 교육과정을 거쳐야 했다. 예기 소리를 들으려면 엄격한 코스를 밟아야 했다. 걸출한 소리꾼·춤꾼을 다수 배출한 평양 기성권번의 경우 1~3학년 별로 1주 6일, 하루 6시간 남짓 수업을 받았다. 가곡·서화·시조·산수·무용·작문 등 과목이 다양했고 때론 서양음악도 포함됐다. 서울·부산·대구·광주·개성·해주 등 지역 권번의 사정도 엇비슷했다. 요즘으로 치면 한국예술종합학교, 혹은 대형 연예기획사쯤 됐다.
 
강좌가 열린 고택문화체험관도 각별했다. 2007년 광주광역시에 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서면서 헐린 광주권번 7칸짜리 건물을 옮겨놓았다. 더는 쓸 수 없는 부재(部材)는 새것으로 교체했지만 1928년 설립된 광주권번 본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은 권번 건물이다. 전통예술 계승을 목적으로 2015년 국비·시비 21억원을 들여 권번문화예술원 간판을 달았지만 개관 이듬해 시 당국에서 일방적으로 고택문화체험관이란 밋밋한 이름으로 바꿨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 안에 기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는 증거다.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할 일이 많다는 뜻도 된다.
 
권번예술원을 6년째 꾸려온 고혜선 원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국무용을 전공한 그는 집안에서 갖고 있던 권번 건물 복원을 책임져왔다. “개원 직후 시의원들이 와서 술을 먹고 고스톱을 치겠다고 했다. 단박에 거절했더니 큰 미움을 샀다. 동네 사람들은 닭백숙 가게를 열려고까지 했다. 20세기 예술의 산실을 이렇게 막 대해도 되는 것인가. 때론 피가 거꾸로 돈다.”
 
기생의 위상이 급락한 데는 60~70년대 기생관광이 결정타 역할을 했다. ‘기생=매춘=치부’ 이미지가 굳어졌다. 예술·교양의 상징이 하루아침에 증발했다. ‘노래를 팔지언정 몸은 팔지 마라(賣唱不賣淫)’는 게 조선시대 이래 기생의 긍지였는데 말이다. 고 원장의 당부가 귓가에 맴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다. 어두운 과거도 있다. 하지만 우리 소리·춤을 부정할 수 있나. 그들이 없었다면 누가 힘겨운 예술혼을 지켜왔겠는가. 선배 예인들에 부끄러울 뿐이다.” 사실 멀리 볼 것도 없다. 일본은 게샤(藝者)를 세계적 문화 콘텐트로 키워내지 않았나. 우리도 이제 자신 있게 껴안을 때가 됐다. 부러 움츠러들 이유가 없다.
 
박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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