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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사랑의 재발명

중앙일보 2019.07.02 00:19 종합 28면 지면보기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영문학

사랑은 가언명령이 아니라 정언명령처럼 우리에게 다가온다. 누구나 사랑받고 사랑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사랑처럼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것도 드물다. 사랑이 지속성을 가지고 그 모든 부정성을 버리며 사랑 자체로 남으려면, (시인 랭보의 말마따나) “사랑은 재발명되어야만 한다.”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변화의 속성을 가지고 있고, 사랑도 예외가 아니다. 사랑은 쉽사리 권태가 되고, 구속이 되며, 폭력이 되고, 나쁜 알리바이가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계속 사랑으로 재발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사실 일상생활의 수많은 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사랑의 재발명을 하고 있다. 사랑을 재발명하지 않을 때 소통이 중단되고, 소통이 중단될 때 관계가 끊어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일상생활은 관계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인간들이 끊임없이 사랑을 재발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사랑의 재발명이 비(非)사랑이 되지 않으려면, 사랑 그 자체의 본질로 계속 돌아가야 한다. 사랑으로의 이 영원한 회귀는 이리하여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삶의 방식이 된다. “진정으로 인간적인 것은 사랑이며, 따라서 이 단어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레비나스의 명료한 전언은 사랑이 인간성(인간됨)의 보편적 조건임을 잘 말해준다.
 

사랑은 가언이 아니라 정언명령
타자의 상한 감정을 들여다봐야
서툰 사랑은 연쇄적 파괴의 원인

사랑 자체로 돌아가려 할 때, 그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나’라는 동일자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타자’를 지향하는 것이므로 ‘나’를 버리지 않을 때 사랑은 실현 불가능한 목표가 된다. 타자를 지향하지 않을 때 관계 자체가 망가지거나 사라지므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실현하기 힘든 목표를 향해 분투한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면서 깨지고 좌절하고 다시 사랑으로 끝없이 돌아가는 존재들이다. 개인적 관계이든 사회적 관계이든, 관계가 파괴된 사람들은 이 복잡한 사랑의 회로에서 무언가 뒤엉킨 사람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랑의 방식에 대하여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논리와 이성의 구성물이 인간의 본질이 아님을 안다. 그것은 에고와 초자아가 만들어낸 교과서이며 허상이다. 사랑과 관련된 대부분의 ‘말싸움’은 주로 이 허상, 논리의 영역에서 벌어진다. 자아는 자신의 불편한 ‘감정’의 상태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으므로 감추며, 그것을 논리와 이성으로 포장한다. 우리는 1인칭으로 ‘나’의 상한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고, 논리로 ‘타자’와 다툰다. 우리는 ‘나’의 논리로 ‘타자’의 논리와 싸우며, 그 논리가 감추고 있는 나와 타자의 ‘상처받은’ 감정을 서로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러나 본질은 이성과 논리 밑바닥에 억압되어있는 감정이다. 그 안에 그것을 초래한 비밀의 역사가 숨겨 있다. 사랑을 재발명하는 데 필요한 모든 자산은 이렇게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 그리고 이성이 아니라 감정 속에 있다. 그 상한 감정의 창고를 잘 들여다볼 때, 서로를 강고하게 위장했던 이성의 방어기제는 무지개처럼 사라진다. 왜냐하면, 이성은 존재의 진정한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랑의 방식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장애가 가정에서 시작되며 연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기까지 근 20년에 걸친 긴 기간 동안 아이는 부모의 권위에 의해 일방적으로 선택된 생존 방식을 배워 나간다. 사랑이 결핍되거나 부재한, 혹은 잘못된 사랑이 지배하는 가정은 일종의 ‘사랑 장애인’을 만들어낸다. 사랑 장애인이 성인이 되어 사회적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큰 혼란과 문제가 발생한다. 충분히 사랑받지 못한 주체는 타자와 성숙한 관계를 맺지 못하며, 공감을 받아보지 못한 주체는 타자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다. 자신을 버리는 사랑을 부모가 보여주지 않을 때, 아이는 이기적 주체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레비나스의 말대로 ‘인간적’이라는 것은 곧 ‘사랑’을 의미하므로, 사랑에 서툰 사람은 여러 면에서 서툰 인간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완벽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다. 레비나스가 “신앙이란 신의 존재 혹은 비존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대가 없는 사랑이 가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고 말한 것처럼, 아무런 조건이 없는 사랑이야말로 최고의 사랑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이런 사랑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대부분 서툰 사랑 때문에 헤매는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끊임없이 재발명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재발명은 논리가 아니라 타자의 상한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사랑은 관계의 언어이다. 관계는 연쇄적이므로 망가진 사랑은 파괴의 연쇄를 가져온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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