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역경이 그들의 첫 우승을 더욱 빛나게 했다

중앙일보 2019.07.02 00:04 경제 7면 지면보기
네이트 래슐리. [AFP=연합뉴스]

네이트 래슐리. [AFP=연합뉴스]

# 네이트 레슐리(36·미국)는 2004년 골프 명문 애리조나 대학의 촉망받는 선수였다. 그의 경기를 보러 왔던 부모와 여자친구가 탄 비행기가 고향인 네브라스카로 돌아가다 실종됐다. 며칠 후 비행기 파편과 주검이 발견됐다. 이후 레슐리는 악몽 속에서 살았다. 그나마 골프장이 피신처였지만, 참혹한 기억을 잊기 어려웠다.
 

가족사고사 고통 이겨낸 레슐리
말더듬 장애 극복 베우이덴하우트
허리부상·압박감 떨쳐낸 이원준
포기 대신 재기, 감동적인 첫 승

레슐리는 이듬해 PGA 2부 투어에서 뛰었지만 1년 후 그 자격을 잃었다. 이후 Q스쿨에서도 낙방하자 부동산 중개업을 하면서 ‘다코타 투어’ 같은 시골 미니 투어에서 뛰었다. 사실상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는 단계였다.
 
2014년 그는 다시 한번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2015년 PGA 투어의 3부 투어인 라틴 아메리카 투어, 2017년 2부 투어를 거쳐 지난해 PGA에 입성했다. 쉽지는 않았다. 지난해엔 무릎 부상으로 절반밖에 못 뛰었다. 올해도 조건부 시드였다.
 
불참 선수들이 많으면 레슐리에게도 기회가 생겼지만, 흔치 않았다. 레슐리는 지난달 25일 로켓 모기지 클래식 월요 예선에 참가했다가 아쉽게 출전권을 따지 못했다. 그런데 선수 한 명이 기권하면서 대기 순번인 그에게 기회가 왔다.
 
길고 굽은 길을 걸어 첫 우승을 거둔 선수들. 사진은 크리스찬 베우이덴하우트. [EPA=연합뉴스]

길고 굽은 길을 걸어 첫 우승을 거둔 선수들. 사진은 크리스찬 베우이덴하우트. [EPA=연합뉴스]

# 크리스찬 베우이덴하우트(25·남아공)는 두 살 때 콜라 캔에 든 쥐약을 마셨다. 병원으로 가서 위세척을 했으나 완벽히 치료하지는 못했다. 신경계에 문제가 생겼다. 말더듬 증세가 남았다. 소년은 전화 받기를 두려워했다. 친구들의 놀림이 싫어 학교에 가기도 꺼려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나 홀로 즐길 수 있는 골프라는 스포츠를 하게 됐다.
 
2014년 영국에서 열린 아마추어 대회에 나갔다가 도핑으로 적발됐다. 말더듬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 먹은 신경안정제가 문제가 됐다. 약을 먹어야 할 이유도 충분하고, 미리 신고도 했지만 2년간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의 길지 않은 인생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베우이덴하우트는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이 위기를 자신이 더 강해질 기회로 삼겠다고 마음먹었다. 징계는 9개월로 줄었고 그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했다. 남아공 2부 투어, 1부 투어를 거쳐 지난해에는 유러피언 투어에 진출했다. 올 시즌 톱 10에 5차례 올랐다.
 
길고 굽은 길을 걸어 첫 우승을 거둔 선수들.사진은 이원준. [KPGA]

길고 굽은 길을 걸어 첫 우승을 거둔 선수들.사진은 이원준. [KPGA]

# 호주동포인 이원준(34)은 2012년 골프채를 부러뜨리고 의대에 가기 위해 공부했다. 2007년 프로 데뷔 당시 "세계 1위에 오를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는 극찬을 받았던 그다. 이원준은 골프 공을 치는 능력이 훌륭했지만, 우승하는 능력은 부족했다. 압박감을 이기지 못했다. 한 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점점 미끄러졌다. 미국 2부 투어에서 의미 없이 공을 난사했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졌다. 그러다 2012년 골프계에서 사라졌다.
 
골프를 중단한 지 2년이 지나자 몸이 좋아졌다. 골프 코스에 다시 나갈 마음도 생겼다. 이원준은 2015년 일본 투어 출전 자격을 땄다. 그러나 2017년 허리 디스크가 파열됐다. 절망의 순간에 마음의 위안을 줄 사람을 만났다. 발레리나 출신의 이유진(31)씨다. 지난해 12월 결혼했고 10월에 태어날 아이도 갖게 됐다.
 
부인 이유진씨는 몸은 산처럼 크지만, 마음은 여린 남편에게 “골프 못해도 좋다. 몸만 아프지 않으면 된다”며 용기를 줬다. 이 말에 압박감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결과가 어떻든 후회하지 않는 경기를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이원준은 지난 달 30일 KPGA 챔피언십에서 프로 데뷔 후 13년 만에 첫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 레슐리는 1일 PGA 투어 로켓 모기지 클래식에서 6타 차로 우승했다. 그는 ESPN 인터뷰에서 “사고 후 뭔가 나쁜 일이 다시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고를 겪은 후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살면서 조금씩 성과를 얻게 됐다고”고 말했다.
 
베우이덴하우트도 같은 날 끝난 유러피언 투어 안달루시아 마스터스에서 6타 차로 우승했다. 그는 “지금까지 버텨낸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그의 말더듬 증세는 치료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어눌한 말 때문에 그의 승리는 더 감동적이었다. 길고 굽은 길을 걸어 첫 우승까지 다다른 이 사내들의 의지와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성호준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