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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호 前국정원장, 거미줄에 몸부림치는 벌레같다 흐느껴"

중앙일보 2019.07.01 14:48
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2017년 11월 19일 청와대 특활비 상납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된 모습.[중앙포토]

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2017년 11월 19일 청와대 특활비 상납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된 모습.[중앙포토]

엄상익 변호사, 이 前 국정원장 변론기 펴내 
"나 자신이 이미 거미줄에 걸린 채 살려고 몸부림치는 벌레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병호 전 국정원장(79)의 변호를 맡았던 엄상익(65) 변호사가『국정원장의 눈물: 老人과 女王』이란 변론기를 펴냈다. 이 전 원장은 지난해 8월 자신을 접견하러 왔던 엄 변호사에게 위와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항소심 중 검찰이 "도주의 우려가 있다"며 이 전 원장의 보석을 반대했을 때의 일이다. 
 
엄 변호사는 책에서 당시 "이 전 원장의 눈에서 하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고 썼다. 변론기의 제목은 이 일화에서 나왔다. 
 
엄 변호사의 책은 이 전 원장이 지난 14일 구속기한 만료로 석방된 지 약 일주일 뒤 출간됐다. 그의 변호를 맡으며 틈틈이 기록해왔던 내용이다.
 
2007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던 엄상익 변호사의 모습. [중앙일보]

2007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하던 엄상익 변호사의 모습. [중앙일보]

이 전 원장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상납했다는 혐의로 지난해 12월 항소심에서 2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검찰이 적용한 뇌물죄는 1·2심 모두 무죄라 판단했다. 
 
국고손실죄의 경우 2심에서 업무상 횡령죄로 변경돼 1년 감형이 됐다. 대법원 선고가 미뤄지는 동안 이 전 원장은 감옥에서 감형된 형을 모두 채웠다.
 
"朴 전 대통령 관련 내용만 수정 요청해"  
엄 변호사는 1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이 전 원장은 감옥에 있던 초기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상태"라며 "신앙심으로 주어진 상황을 잘 극복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전 원장은 책 내용을 미리 확인한 뒤 출간 허락을 했다고 한다.
 
엄 변호사는 "이 전 원장은 출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개인적 소회나 비판적 내용을 담은 부분에 대해서만 수정 요청을 했다"며 "박 전 대통령은 이미 비참한 상황에 놓였고 '대통령을 모셨던 사람으로서 안타깝다'는 심경을 전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상납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구속기간 만료로 14일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상납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이병호 전 국정원장이 구속기간 만료로 14일 서울구치소에서 석방되고 있다. [연합뉴스]

책에는 엄 변호사가 박 전 대통령에게 '이 전 원장의 특활비에 대한 입장을 밝혀달라'며 이 전 원장 재판의 증인으로 신청하고 직접 박 전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낸 일화도 나온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이 전 원장의 개인적 소회는 책에 극히 일부분만 남아있다.
 
엄 변호사가 구치소에서 이 전 원장에게 "보시기에 박근혜는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자 이 전 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워낙 자폐적인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지금 이 좁은 감방에서 혼자 버텨낼 수 있는지도 몰라요. 국정원장을 3년 동안 했지만 나도 몇 번 보지 못했어요"
 
이 前 국정원장, 철창 밖으로 소리치기도  
책에는 수감 초 이 전 원장이 판사에게 원망감을 표현했던 일화들도 담겨있다. 항소심 판결 직후 엄 변호사가 서울구치소를 찾았을 때의 일이다. 이 전 원장은 엄 변호사에게 "판사의 추측만으로 있지도 않았던 새로운 사실이 창조되는 게 법정이더라고요. 억울함 때문에 신경안정제를 먹지 않고는 잘 수가 없었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엄 변호사는 이 전 원장이 철창 밖으로 '내가 언제 돈을 횡령했느냐'고 소리를 치고 '내가 언제 정치에 관여했느냐'면서 허공에다 주먹질을 한 일화도 전한다.
 
엄 변호사는 이 전 원장의 변호인이면서도 그가 특활비 상납 혐의에 대해 "제대로 보고받은 적이 없다""그런 의도로 사용될지 몰랐다"는 주장에 대해선 동의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힌다. 
 
박근혜 정부시절 청와대 국정원 특활비 상납 혐의로 기소된 이병기(사진 왼쪽부터), 남재준, 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모습. 세 국정원장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뉴시스]

박근혜 정부시절 청와대 국정원 특활비 상납 혐의로 기소된 이병기(사진 왼쪽부터), 남재준, 이병호 전 국정원장의 모습. 세 국정원장은 모두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뉴시스]

엄 변호사 "특활비 상납은 적폐, 시대정신이 철퇴 내려" 
실제 이 전 원장이 그의 앞에서 눈물을 떨구며 억울함을 전할 때도 엄 변호사는 과거 자신이 국정원에서 근무하며 영부인의 특활비 상납을 거부했던 일화를 전하기도 한다. 그 후 엄 변호사는 국정원을 그만둬야 했다.  
 
엄 변호사는 이 전 원장에 대한 법원의 판단 이후 "정치권력이 국정원에 숨겨진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없게 됐다"며 "이 전 원장이 대신 떠안은 세상의 죄를 세밀하게 보았다. 시대 정신이 이런 적폐에 대해 철퇴를 내린 것"이라고 썼다.
 
엄 변호사는 중앙일보에 "변호사로서 이번 사건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을 전하고 싶었다"며 "꼭 법원 안이 아니라도 법원 밖에서 또 독자들에게 내 변론을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박태인 기자 park.ta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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