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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도덕을 망각한 공산주의자는 반대한다

중앙일보 2019.07.01 00:26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지구 유일 분단국가의 비극적 상징인 판문점에서 남·북·미 세 정상이 악수했다. 비핵평화로 나아가는 역사적인 순간에 19년 전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때 “공산주의자도 도덕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공산주의자의 도덕’은 보이지 않는다.
 

판문점 3자 회동 … 비핵평화 기대
어려울 때 결정적 도움 주는데
북·미 대화 참견 말라는 건 비례
당당해야 무시당하지 않는다

북한 외무성의 미국담당 권정근 국장은 6월 27일 담화를 통해 “조(북)·미 대화는 남조선 당국이 참견할 문제가 전혀 아니다”고 했다. 또 “남조선 당국을 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며 “남조선 당국은 제 집의 일이나 똑바로 챙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전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믿는다.(중략) 영변의 핵시설 전부가 검증하에 전면적으로 완전히 폐기된다면 북한 비핵화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든다”고 했다. 미국의 안보전문가들로부터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도 다음 날 일개 ‘미국담당 국장’이 우리 대통령을 향해 모욕적인 언사를 늘어놓은 것이다.
 
북한의 건망증은 도를 넘었다. 지난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전의 우여곡절을 까맣게 잊었다. 김계관·최선희의 막말로 북·미 정상회담이 무산될 뻔하다가 가까스로 불씨가 되살아난 지난해 5월 26일 새벽 3시에 김 위원장은 SOS를 보냈다. 문 대통령은 12시간 만에 판문점 북측 지역 통일각에서 의전도, 격식도 없는 정상회담을 가졌다. 어떻게든 북·미 회담을 성사시키려고 1박4일의 일정으로 워싱턴에 날아가 트럼프에게 홀대당하고 온 직후였다.
 
그런데도 북은 안면몰수하고 통미봉남(通美封南) 모드로 나왔다. ‘영변’과 제재 해제를 교환하려던 올해 2월 27~28일 하노이 북·미 2차 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난 화풀이를 우리에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시진핑의 방북으로 몸값이 높아졌다고 한국을 무시하는 것인가. 이것도 아니라면 트럼프 대통령과 친서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면서 문 대통령을 용도폐기하겠다는 의도인가. 전 세계가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국가성을 존중하지 않는 중대한 비례(非禮)다.
 
세 정상의 판문점 이벤트는 화려했지만 우리는 어둠 속에 감춰진 혼란스러운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지금 남북 문제뿐 아니라 세계의 판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깊은 잠에 들었던 거인 중국이 깨어나면서 시작된 격동이다. 한 세기 이상 국제질서를 관리해 온 미국은 노골적인 힘을 과시하는 중국의 샤프파워(sharp power)를 방관할 수 없다. 두 강대국의 무역전쟁은 기술패권 경쟁으로 치닫는데 핵심인 4차 산업혁명의 승부는 AI와 빅데이터에서 갈린다. 중국이 앞서가고 있다. 설사 트럼프가 아니었더라도 중국과의 일전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트럼프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윽박지르면서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평화와 번영의 엔진은 유엔과 GATT(지금은 WTO)였다. 미국은 두 기구를 창설하고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런 미국의 대통령이 무용론과 탈퇴를 거론하고 있다. 미국 우선주의의 광풍에 다자주의(multilateralism)가 신음하고 있다. 미국의 동맹국이고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직격탄을 맞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경제는 장기를 공유하고 있는 샴의 쌍둥이다. 이걸 분리하자는 것은 공멸행위다. 트럼프가 그제 G20 회의에서 “화웨이에 대한 미국 기업들의 부품공급은 계속될 것”이라고 한발 물러서야 했던 이유일 것이다. 사실 뉴욕타임스는 이보다 앞서 미국 상무부의 수출규제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와 인텔 등이 화웨이에 부품을 보내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천하대란의 시대다. 당당한 우리의 논리, 생존전략이 필수다. 강대국에 비굴하게 굴어선 안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북한에 대한 자세다. 할 말은 해야 한다. 문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미국과 실무회담에 응하라고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영변 핵시설 폐기를 과대평가해 비판을 초래한 것은 잘못이다.
 
모욕적인 외무성 국장의 담화에 대해서는 사과를 받아야 한다. 그래야 북한이 우리를  존중하고, 미국의 태도도 달라진다. 북한은 작년 3월 이후 13차례(한국 3회, 미국 2회, 중국 5회, 러시아·베트남·싱가포르 1회)에 걸쳐 정상회담을 했다. 그 여세로 판문점 3자 회동과 북·미 깜짝 정상회담까지 이뤄내 전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문 대통령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어제 “문 대통령과 좋은 파트너십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북·미 양자회담이 열린 장소도 남쪽 자유의집이었다. 우리가 없으면 어떤 진전도 어렵다는 사실을 북한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현 정부는 남북문제를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려는 관성과 결별해야 한다. 그러면 조급증이 사라지고 야당과 보수를 설득할 길도 열린다. 남남통합이 먼저다. 그러면 북한도,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더 잘 다룰 수 있다. 우리를 무시하는 공산주의자에게 “도덕은 어디로 갔느냐”고 꾸짖을 수도 있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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