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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의 퍼스펙티브] 한국인은 안보와 성장 중시하는 물질주의자들 많다

중앙일보 2019.07.01 00:02 종합 26면 지면보기
한국인의 가치관과 정책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초등학교 때 배운 과학 실험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용질을 용매에 섞으면 용액이 된다. 물에 설탕을 녹여 설탕물을 만든다면, 설탕은 용질이고 물은 용매, 그리고 설탕물은 용액이다. 원하는 용액을 얻기 위해서는 용질과 용매 둘 다 중요하다. 설탕 대신 소금을 넣었다면 기대했던 단맛이 아니라 짠맛이 날 것이다. 똑같이 투명해 보인다고 해서 물 대신 알코올에 설탕을 섞었다면 맛을 보려다가 자칫 큰 사고가 날 수도 있다. 그러니 설탕물을 얻으려면 설탕과 물 둘 다 중요하다.
 

국민소득 3만 달러 넘었어도
한국인은 생존적 가치관 여전
문재인 정부, 국민 설득하려면
성장을 전면에 내세워야 가능

한국에서 정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용매의 특성은 생각하지 않고 용질에만 집착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정책이 용질이라면 그 정책의 대상이 되고 그 정책을 수용해야 하는 국민의 가치관 특성이 용매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서로 다른 정치 세력들은 제각기 자신들의 용질만이 최고이고 상대방의 용질은 엉터리라고 주장한다. 자신들의 정책이 옳고 상대방의 정책은 틀렸다는 것이다.
 
물론 최선의 정책을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국정은 최고의 정책 내놓기 콘테스트가 아니다. 결국은 성과가 말해주는 것이다. 용질만 중요하고 용매는 중요하지 않은가? 용질만 중요하다면 한 나라에서 잘 통했던 정책은 다른 나라에서도 똑같이 잘 통해야 할 것이다.
  
최선의 정책보다 지속되는 정책
 
유럽에서는 현직 총리가 동성애 파트너와 결혼식을 올린 지 이미 10년인데 한국에서는 차별금지법조차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책수용자의 상당수가 반대하기 때문이다. 대학 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미국처럼 대학등록금을 대폭 올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책 수용자들이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매가 달라지면 같은 용질도 다른 용액을 만든다. 그러니 기억하자. 좋은 정책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정책 수용자 특성을 고려하는 게 중요하다.
 
참여정부 때의 기억 하나. 부동산 정책 논쟁으로 정치권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느 정책 관련 학회에 참석했다가 생각지도 않았던 공학자의 발표를 우연히 듣게 됐다. 그는 시뮬레이션 전공이었는데, 본인은 정책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하도 세상이 시끄러우니 지금 논의되는 몇 가지의 부동산 정책들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본인의 전공을 살려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결과는 무엇이 좋은 정책이라고 열을 올리던 사람들을 머쓱하게 하는 것이었다. 논쟁이 되는 정책 중에 무엇을 택하더라도, 10년만 꾸준히 지속할 수 있다면 집값은 거의 똑같은 수준으로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기억하자. 자주 바뀌는 최선의 정책보다 오래갈 수 있는 차선의 정책이 더 좋은 결과를 낳는다.
  
세속적이면서 생존적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래픽=최종윤 yanjj@joongang.co.kr]

그렇다면 우리의 정책 용매, 즉 한국인 가치관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림 1을 보자. 전 세계 100여 개 국가가 참여하여 거의 비슷한 시기에 측정한 국가별 가치관의 특징을 2차원 평면에 그린 ‘세계문화지도(Cultural Map of the World)’이다. 이 그림은 ‘세계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 데이터로부터 얻어진다. 이 조사는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어 대략 5년 주기로 지금까지 수십 개 국가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를 추적해왔다. 전통적 가치관과 세속적 가치관, 생존적 가치관과 자기 표현적 가치관이라는 기준을 조합해보면 한국인은 매우 세속적이고 생존적인 사람들이라는 결과가 얻어진다. 따라서 정책을 펼칠 때도 세속적이고 생존적인 정책이 잘 먹힐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이 지도에서 한국인 가치관의 진정한 특이성을 이해하려면 그림 2와 함께 보아야 한다. 사람들의 가치관 변화는 경제성장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림 1에서 국가를 나타내는 점들을 지워버리고 해당 지역에 놓인 국가들의 국민총생산(GNP)을 나타낸 것이 그림 2이다. GNP 2000달러 미만일 때는 전통적이고 생존적인 가치관을 가진다. 그러다가 2000~5000달러 구간에서는 세속적 가치관으로 급격하게 옮겨가는 변화가 일어난다.
 
5000달러를 넘어가면 또 다른 변화가 일어난다. 이번에는 자기 표현적 가치관이 빠르게 늘어나고 이것은 1만5000달러까지 계속된다. 1만5000달러를 넘게 되면 이러한 변화가 더욱 가속화되어, 매우 세속적이고 자기 표현적인 가치관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가치관의 변화는 마무리된다.
 
이 단순해 보이는 경향성에 놀랍게도 예외는 거의 없다.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 국가 두어 개를 제외하면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한 예외이다. GNP가 1968달러였던 81년에 한국이 생존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외환 위기 직전인 96년에 한국의 GNP는 1만3254달러였고, 이때 이미 한국인의 자기 표현적 가치관이 늘어났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제 3만 달러를 넘은 시점에서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조금도 변하지 않고 2000달러 시절의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어려웠던 시기의 경험 중시
 
그렇다면 생존적 가치관에 머물러 있을 뿐 자기 표현적 가치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겪었던 경험을 중시하고 안보와 성장을 중시하는 물질주의자들이 많다는 뜻이고, 개인의 발전과 자유, 정책 결정에 대한 시민 참여, 인권과 환경을 중시하는 탈물질주의자는 적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에서 탈물질주의자의 비중이 45% 내외인 데 비해 한국의 탈물질주의자는 15% 남짓하다. 안보와 성장을 내세우는 정치 세력에게는 매우 유리한 조건이고, 자유·참여·인권·환경을 중시하는 정치 세력에게는 몹시 불리한 조건이다. 이러한 국민의 가치관 특성에 정당을 대입해보면 더욱 이해가 쉽다.
 
자유한국당은 안보와 성장만 내세우면 기본 점수는 너끈히 넘긴다. 85%에 달하는 물질주의자들 중 상당수는 보수 정당이 안보와 성장을 잘할 것 같다는 이미지 때문에 그들에게 표를 주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용매, 즉 국민의 가치관 특성이라는 맥락에서 기본적으로 불리한 입장이다. 민주주의와 인권 정책을 잘할 것 같다는 이미지로 표를 줄 사람은 많아야 1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경제정책서 혁신성장 더 부각돼야
 
경제정책에 대입해 보면, 자유한국당은 기업 하기 좋은 나라, 모두가 부자 되는 나라만 외치면 된다. 민주당이 경제민주화만 외친다면? 백전백패를 예약하게 된다. 한국의 유권자를 설득하려면 전략적으로 성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맥락 속에서 다른 가치를 펴나가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지난 2년 동안 용매의 특성을 좀 더 잘 이해했더라면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대통령과 집권 세력의 국정 철학이 있게 마련이니 마냥 용매의 특성만 추종하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경제 정책의 3대 축인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 공정경제 중에서 혁신성장이 크게 부각되었더라면, 그리고 그 맥락 속에서 소득 정책이 추진되었더라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점을 앞의 두 그림은 보여주고 있다.
 
마침 청와대 정책실장과 경제수석이 바뀌었다. 정책의 내용 못지않게 정책의 수용성을 고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한다. 중요한 것은 용질의 진정성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어떤 용액이 만들어지느냐이기 때문이다.
 
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리셋 코리아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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