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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트럼프 방한, 곱씹어 보는 우리 처지

중앙선데이 2019.06.29 00:21 642호 31면 지면보기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 1 트럼프 미 대통령이 오늘 서울에 온다. 19개월 만이다. 1박 2일 짧은 방문이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 의미는 사뭇 심장하다.
 

주말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북·미관계 새로운 진전 있나
우리에겐 무슨 말, 요구할까
원칙·기준 정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우리 앞길 첩첩산중인 마당에
역량 흩어지고 갈등은 깊어져

그제 미 정부 고위관리는 “북한과 한·미동맹, 그리고 무역문제,” 이 두 가지를 이번 방문 의제로 설명했다. 무엇보다 하노이 회담 이후 암중모색 중인 북·미관계에 새로운 진전이 있을지 초미의 관심사다. 비무장지대(DMZ)도 방문한다니 거기서 무슨 말을 할지, 그 형식은 어떨지 지켜보자. 한·미동맹을 확인하고 북·미협상에도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
 
무역은 어떤가? 미·중 갈등의 창끝에 서 있는 우리에겐 트럼프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할지 조마조마하다. 우리 기업인들과 만남도 있다고 한다. 화웨이 제재처럼 아주 구체적인 요구를 던질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미적지근 대응했다간 큰 부담으로 돌아올 것이다. 오사카에서 시진핑 주석과 담판 직후 방문이라 그 열기가 그대로 전해지리라.  
 
오사카 담판에서 설사 합의가 도출된다 해도 바뀌는 건 없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선택을 요구하는 문제들은 그 합의에 들어갈 수도 없다. 합의 이후 그 이행을 두고 오히려 미·중 다툼은 더 격화될 것이다. 경제문제에서 양국 관계는 이미 깨진 그릇이다. 대충 붙여도 이전으로 돌아가기 어렵다.
 
# 2 진부한 이야기지만 국제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경제력과 국방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작은 나라가 살 길은 이것뿐이다. 거기 하나 더 있다. 어려운 일일수록 확실한 원칙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나마 대접받는다. 필요할 때 매듭을 짓고, 때론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 그 순간 괴롭지만 그래야 다음에 그 일을 피한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어떻게 모든 친구를 만족시키는가. 손해만 생각하고 리스크만 따지면 아무것도 못 한다. 돌다리만 두드리다간 결코 강을 못 건넌다.
 
미·중 분쟁에서 우리 처신은 어렵다. 어려움을 넘어 괴롭다. 그간 우리는 마치 두 나라 요구를 모두 들어 줄 수 있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러다간 게도 구럭도 잃는다. 구체적인 요청엔 이제 원칙을 정해 대응해야 한다. 원칙적인 대응이란 무엇인가? 국제법과 규범에 입각한 대응이다. 자세히 따져보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못 하는 일이 있다. 이걸 먼저 따지는 숙제부터 해야 한다. 논리를 찾아 선후를 살피고 기본을 밝힌 다음 분명하게 이야기해야 한다. 지금 독일, 프랑스, 영국이 그렇다.
 
단기적 파장은 불가피하나 우리 입장만 정확하고 분명하면 원래 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그 시간 동안 견뎌낼 도리밖에 없다. 이걸 놓치고 모두를 만족시키고자 미소만 보내다간 우리 행로는 정해져 있다. 격한 말을 듣고도 웃어야만 하는 국제사회의 감정노동자다.
 
# 3 아마 먼 훗날 역사는 2019년 전후를 국제질서 지각변동의 시대로 기록할 것이다. 안보, 경제, 교역에서 2차대전 후 70년의 국제사회 기본틀이 허물어지고 있다. 이 전환기에 어떻게 키를 잡고 방향타를 돌리는지에 따라 앞으로 수십 년, 아니 그 이상 우리 운명을 가른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한 패배주의에 빠져 있다. 이 전환기에, 미·중 분쟁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다. 가만히 숨죽이며 흘러가는 대로 두면 어떻게 정리되겠지 하는 마음이다. 바뀌는 세상 흐름이 피부에 와 닿는데도 경고하고 독려하는 향도(嚮導)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대신 정부는 입장이 곤란하니 각자 알아서 처신하라는 신호만 보낸다. 우리 기업들을 중국 정부가 소집하고 미국 대통령이 부른다. 정부가 이제 적극적으로 나서 방어막도 되고 등대도 되어야 한다. 상대방이 선을 넘을 때 철저한 준비와 논리로 왜 딱 부러지게 이야기하지 못 하는가.
 
우리가 국제사회의 새로운 흐름을 막을 수 없다. 지금 상황이 정부 잘못도 아니다. 어려운 사정,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래도 국민들은 무언가 치열한 고민과 역동적인 대응을 보고 싶어 한다. 등불을 들고 앞길을 헤치며 손짓하는 그런 자신감이다.
 
# 4 이 와중에 일들이 매듭을 맺고 정리된다는 느낌보다 점점 풀어지고 벌어지는 모습이다. 주변 정세는 어려워지는데 중요한 나라들과의 관계는 삐걱거린다. 경제는 안갯속이고 북한 문제도 알 듯 말 듯하다. 열심히 좋은 물건 수출한다는 것도 날로 어렵다.  
 
더 안타까운 건 그나마 우리가 가진 역량도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술술 새어 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모래시계 밑동에서 모래 빠져 나가는 듯하다. 위는 멀쩡한데 서서히 내려간다. 온 국민의 역량을 결집해도 간당간당한 시기에 서울 시내 곳곳에 한쪽의 증오와 다른 쪽의 분노를 담은 형형색색의 플래카드가 펄럭인다. 우리끼리 다투느라 정신없다. 이래서야 지금의 풍랑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이번 주말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기대와 조마조마함이 교차한다. 과연 무슨 말을 할까. 트위터에 뭐라고 쓸까. 또 그의 말과 글을 두고 우리는 얼마나 다툴까.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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