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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 기습의 명수 쑹스룬 불러 “조선 가서 솜씨 발휘해라”

중앙선데이 2019.06.29 00:20 642호 28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83> 
1950년 11월 19일, 장진호 지역으로 향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1950년 11월 19일, 장진호 지역으로 향하는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돈 퍼붓고 바보 되기 쉬운 것이 홍보다. 얼치기들이 하면 그렇다. 선전은 차원이 다르다. 자신의 존재감과 장점을 만방에 각인시키는 것이 선전이다. 실패를 성공으로, 패배를 승리로, 욕심을 덕행으로 포장시킬 줄 알아야 선전가 자격이 있다. 억지와 이간질, 모든 책임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은 기본이다. 6·25전쟁 참전 후 중국이 그랬다. 국제무대에서 평화를 외치며 뒤로는 전쟁에 골몰했다.
 

마오 “미 해병대에 본때 보여줘라”
대만 공격 준비하던 쑹스룬 차출

쑹의 15만 병력 장진호 주변 매복
미군은 코앞 포위될 때까지 깜깜

같은 날 우슈취안은 안보리 참석
미 대표와 대만·한반도 문제 설전

1950년 겨울, 중국 특파대사 우슈취안(伍修權·오수권)은 유엔에서 미국 비난과 신중국 선전에 열을 올렸다. 한반도 북방 최대의 호박(湖泊), 장진호 주변이 인간지옥일 때였다.
 
11월 28일 오후, 우슈취안이 유엔 안보리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의 명을 받들어 전 중국 인민을 대표해 이 자리에 나왔다. 중국영토 대만과 우리의 인접국 조선을 무장 침략한 미국 정부를 고발한다. 미국은 대만의 미국위탁관리와 중립화를 은밀히 획책했다. 카이로회담과 포츠담선언에 위배된다. 대만을 자신들의 항공모함 취급하는 미국은 규탄받아 마땅하다.”
 
미국대표 오스틴이 반박에 나섰다. “미국은 대만을 침략한 적이 없다. 중화민국 외교부도 미국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고 공언했다.” 우슈취안이 발끈했다. “미 7함대와 13항공단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대만에 없다면 화성(火星)에 있다는 말이냐 뭐냐. 현재 대만에 와 있다. 미 제국주의자는 1895년 일본 침략자가 걷던 길을 답습하고 있다. 지금은 1950년이다. 1895년이 아니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도 변했다. 중국도 그때 중국이 아니다. 중국 인민들의 침략자 구축(驅逐)과 영토회복 각오를 가볍게 보지 마라.”
 
1952년 9월 제9병단은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귀국 후 가족과 소풍 나온 쑹스룬.

1952년 9월 제9병단은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귀국 후 가족과 소풍 나온 쑹스룬.

중국대표단은 세 가지 건의안을 안보리에 제출했다. “미국의 대만 침략과 조선문제 개입은 범죄행위다. 견책과 제제를 바란다. 미국 군대는 대만에서 철수해라. 미국을 비롯한 모든 외국 군대도 조선에서 철수해라.” 당시 미국에는 중공에 우호적인 인사가 많았다. 연설이 끝나자 방청석에 있던 에드가 스노우가 다가와 악수를 청했다.
 
얘기는 5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 10월 20일, 중국인민지원군의 압록강 도하 이튿날 마오쩌둥이 쑹스룬(宋時輪·송시륜)을 불렀다. 쑹스룬이 대만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미국이 대만해협을 봉쇄했다. 대만은 너무 멀어졌다. 가까운 조선에 가서 솜씨 발휘해라. 미 해병대에 본때 보여 줘라. 술 부지런히 퍼마셔라.”
 
술 얘기 꺼낸 이유가 있었다. 쑹스룬의 주량은 중국 최고였다. 당내에서 두 번째라는 소문이 장정시절부터 자자했다. 첫째가 누군지는 이름만 무성할 뿐 지목된 사람이 없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라는 설이 있지만, 저우도 쑹스룬과는 대작을 피했다.
 
쑹스룬은 술 마신 다음날은 전쟁에서 꼭 이겼다. 항일전쟁시절에도 그랬고, 국·공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맨정신에 지고 온 적은 있어도 만취상태에서 패한 적은 없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다. “검객 이태백은 술 취하면 시인(詩人)으로 돌변했다. 무송은 술 취한 후에 호랑이를 때려잡았다. 쑹스룬은 만취해야 전쟁에서 이긴다.” 주장군(酒將軍)이라는 별명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차오관화(왼쪽 둘째)와 중국 최초의 여성외교관 궁푸셩( 普生)을 대동, 미국기자초대회에 참석한 우슈취안(왼쪽). 1950년 12월 4일, 뉴욕. [사진 김명호]

차오관화(왼쪽 둘째)와 중국 최초의 여성외교관 궁푸셩( 普生)을 대동, 미국기자초대회에 참석한 우슈취안(왼쪽). 1950년 12월 4일, 뉴욕. [사진 김명호]

마오쩌둥은 쑹스룬을 제9병단 사령관 겸 정치위원에 임명했다. 황포군관학교 5기생인 쑹스룬은 타고난 전략가였다. 매복과 기습에 일가견이 있었다. 휘하 군단장들에게 요구했다. “미군 전술의 특징을 연구해라. 지휘관의 소양을 제고시켜라. 종이가 강철에 대항할 방법을 찾아라. 나는 승리를 자신한다.”
 
9병단은 20·26·27 3개 군이 있었다. 총 15만 병력 대부분이 남방 출신이었다. 목적지도 모른 채 동북으로 이동 중 열차 안에서 항미원조(抗美援朝) 지원군으로 출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9병단은 11월 7일과 12일, 19일, 세 차례에 걸쳐 야밤에 압록강을 건넜다. 고산지역 거쳐 21일 새벽 장진호 주변 지역에 집결했다. 한국군과 함께 북진 중이던 미군은 중국 지원군 대부대가 코앞에 올 때까지 깜깜했다.
 
장진호 인근까지 미군 정찰기에 발각되지 않은 것은 전쟁사에 남을 기적이었다. 장진호에서 쑹스룬과 격돌한 미 해병대 1사단장 스미스도 경탄했다. 정전 체결 후, 미군 전사 연구가에게 말했다. “장진호 일대는 근본적으로 군사행동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칭기즈칸도 정복할 엄두 못 낼 그런 곳이었다. 병력 15만을 잠복시켜 우리를 포위한 쑹스룬은 무모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대전략가였다.”
 
11월 27일 밤, 쑹스룬이 공격명령을 내렸다. 사방에서 피리, 꽹과리, 나팔 등 온갖 괴상한 소리가 난무했다. 통신 수단 열악한 중국지원군의 연락방법이었다. 미군은 무슨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비슷한 시각, 우슈취안은 미국의 제의로 유엔 안보리에서 열린 중국의 한반도 침략규탄 토론회에 참석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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