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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의 수렁에 빠진 쇼팽, 상드에겐 쉬운 먹잇감이었다

중앙일보 2019.06.28 12:00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30)
 
결코 그녀의 외모가 예쁜 것은 아니었다. 작은 키에 크고 검은 눈,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졌다. 체구는 통통한 편이었고 실제 나이에 비해서는 어려 보였다. 행동은 무겁고 말수도 적었다. 하지만 필요할 때면 자신만의 색채를 가지고 당당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있었지만 대체로 표정은 진지하다 못해 어두워 보이기까지 했다.
 
조르주 상드. 루이지 깔라마따 Luigi Calamatta 의 판화 1837.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조르주 상드. 루이지 깔라마따 Luigi Calamatta 의 판화 1837.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소장. [사진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조르주 상드는 수수한 가운데 겸손했고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는 인간적인 면도 갖추고 있었다. 재기발랄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녀와의 대화에는 깊이가 있었다. 하인리히 하이네, 뮈세를 포함해서 그녀와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졌던 저명인사들은 그녀에게서 묘한 매력을 느꼈다. 분명 외모만이 사람들을 끄는 것은 아니다. 뮈세는 상드의 눈을 칭송했다.
 
누가 보아도 둘은 안 어울렸다. 오히려 극과 극이었다. 우유부단한 쇼팽과 달리 상드에게는 강한 에너지가 있었다. 그가 곤란을 외면하고 피할 때, 그녀는 열정적으로 의문에 파고들었다. 그는 예의범절에 충실했고, 고급 취향의 사교모임을 좋아했지만, 그녀는 위선적인 예의범절이나 점잔 빼는 모임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잘 갖춰 입은 세련된 옷차림새를 중시했던 쇼팽과 달리 자유로운 활동파 상드는 거추장스러운 의복을 싫어했다.
 
마리아와의 약혼이 깨지면서 쇼팽의 꿈도 부서졌다. 상처는 컸다. 마리아의 부모가 보기에, 폴란드의 국민적 영웅이며 천재적인 음악가 쇼팽은 친구로서는 훌륭했지만 사위가 되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다. 건강도 문제였고, 경제적인 면과 신분적인 면도 걸렸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 절망에 빠진 쇼팽에게 상처를 보듬어 줄 존재는 더 절실히 필요했다.
 
하지만 6살 연상의 유부녀이며 스캔들 메이커인 조르주 상드는 예비후보 중에도 없었다. 리스트와 마리 다구는 쇼팽과 상드를 이어주려 노력했지만, 상처 입은 쇼팽은 소수의 잘 아는 사람 외에는 만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상드는 1837년 봄과 여름 두 차례나 리스트와 마리 다구를 노앙으로 초대했다. 그러면서 쇼팽도 데리고 오라고 부탁했다. 쇼팽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를 둘러싼 벽은 높아졌고 그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했다.
 
쇼팽은 아스톨프 드 퀴스틴(Astolphe de Custine, 1790 ~ 1857)후작과 가까웠다. 동성애자로서 여성스러운 섬세한 면이 있는 퀴스틴 후작은 그의 아픔을 잘 이해했다. 파리 인근 엥기엉 호숫가에 있는 그의 별장은 휴식을 취하기에 좋았다. 쇼팽은 그가 편했다. 그의 별장에도 자주 들러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랬다. 퀴스틴은 쇼팽에게 공감을 전했다.
 
“당신은 아픔과 함께 시심(詩心)의 최고 경지에 올랐어요. 작품에 배인 우울함이 가슴을 적십니다.”
 
프레데릭 쇼팽. 알베르트 그레플레 Albert Gräfle 그림. 연대 미상.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프레데릭 쇼팽. 알베르트 그레플레 Albert Gräfle 그림. 연대 미상. [사진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이때 상드는 한때 정열을 바쳤던 정치가이며 변호사인 미셸 부르주가 떠난 후 공허한 마음을, 작가인 디디에 그리고 자신의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극작가 말피유와의 관계로 달래고 있었다. 어느새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쇼팽에게 끌리는 마음은 점점 강해졌다. 돌파력이 있는 상드였다. 그녀는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작정하며 스스로 자세를 이렇게 표현했다. ‘적어도 노력해 봐야지, 순수한 열정과 흠모의 마음으로’.
 
상드는 파리의 폴란드인 사회에 다가갔다. 쇼팽이 동포를 대하는 것이 특별하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쇼팽이 아버지처럼 따랐던 그셰마와, 폴란드 민족 시인인 미츠키에비츠, 비트비츠키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과의 관계를 활용했다. 쇼팽과 상드는 몇 차례의 모임에서 얼굴을 마주칠 기회가 있었다. 상드의 배려하는 마음과 치유력 있는 대화는 점차 쇼팽에게도 통했다.
 
쇼팽에게는 털어놓고 조언을 듣고 싶은, 실패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듯한 상드는 그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상드의 깊은 속내와 고양된 정신이 쇼팽에게 조금씩 보였다. 그는 쉬운 먹잇감이었다. 점차 둘의 간극은 좁아졌다. 1838년 봄을 넘어서며 쇼팽은 심하게 흔들렸고 여름을 지나며 둘은 깊은 관계가 되었다. 이것은 마리아가 남긴 절망이 가져다준 뜻밖의 귀결이었다.
 
쇼팽은 익숙하지 않은 길을 가며 주저하고 두려워했다. 쇼팽에게 우정보다 더한 감정을 품고 있던 퀴스틴 후작과 가족같이 지냈던 그셰마와는 염려하는 눈으로 두 사람 관계의 진전을 보고 있었다. 상드의 연인 말피유는 둘의 관계를 모른 채 쇼팽의 음악을 칭찬했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챘고 분한 마음에 상드를 권총으로 위협했다. 말피유가 쇼팽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도 있었다. 상드와 쇼팽은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몇 년 사이에 부쩍 건강이 나빠져 있던 쇼팽이었다. 그 해(1838) 3월에 있었던 자선공연에서는 프로그램에 있던 연주를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이 힘들 정도로 건강은 엉망이었다. 친구들과 의사는 그에게 휴양을 권했다. 상드는 상드대로, 날 때부터 허약했던 아들 모리스의 류머티즘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러잖아도 아이들을 데리고 따뜻한 남쪽에서 시간을 좀 보내려고 하던 참이었다.
 
상드는 쇼팽에게 남쪽으로 가는 길에 동행을 제안했다. 그녀는 주저하는 쇼팽을 언제까지 두고만 보고 있지 않았다. 1838년 10월 중순, 상드는 파리를 떠나며 쇼팽에게 통고했다. 그녀는 스페인국경 근처의 지중해 연안 도시 페르피냥(Perpignan)에서 4일 동안 쇼팽을 기다려 주겠다고 했다. 그 4일 동안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상드는 아이들만을 데리고 마요르카 섬으로 갈 것이었다.
 
레슨을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자유분방하기로 유명한 유부녀와의 추문이 퍼지면 자신의 위상에 오는 손상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쇼팽은 생각이 많았다. 사진은 파리 몽소 공원의 쇼팽. [사진 pixabay]

레슨을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자유분방하기로 유명한 유부녀와의 추문이 퍼지면 자신의 위상에 오는 손상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쇼팽은 생각이 많았다. 사진은 파리 몽소 공원의 쇼팽. [사진 pixabay]

 
쇼팽은 생각이 많았다. 늘 보던 의사 없이 살 수 있을까? 피아노에서 떨어져 있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레슨을 해서 하루하루 먹고살고 있었는데 레슨을 멈추면 어떻게 되는가? 그는 저축해둔 돈도 없었다. 또 예의 바른 모습과 모범적 태도를 앞세워서 상류사회에서 레슨과 사교활동을 할 수 있었는데, 자유분방하기로 유명한 유부녀와의 추문이 퍼지면 자신의 위상에 오는 손상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상드가 파리를 떠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문득 싸늘해진 늦가을 바람이 그를 때렸다. 곧 닥칠 파리의 혹독한 겨울은 그의 몸을 해칠 것이다. 온화한 기후는 심신이 피로한 그에게 꼭 필요했다.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서둘러 은행가인 레오와 피아노 제작자인 플레옐에게 돈을 빌렸다. 프랑숌, 그셰마와, 폰타나, 마투진스키에게만 여행 계획을 알렸다. 동시에 추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비밀을 부탁했다. 그는 급히 상드의 뒤를 쫓았다.
 
한편 아이들과 함께 파리를 떠난 상드는 디종(Dijon)을 거쳐 리용(Lyon)에 이르렀다. 리용에서는 배를 이용해서 론(Rhône)강을 타고 내려가 아비뇽(Avignon)으로 갔다. 거기서 다시 마차를 타고 님(Nîmes)을 거쳐 스페인 국경도시 페르피냥에 도착했다. 하루를 보냈다.
 
쇼팽이 과연 올까? 상드는 두 사람의 미래에 동전 던지기를 했을지도 모른다. 페르피냥에서의 두 번째 날, 급행 우편마차로 4일 밤을 새워 달려온 쇼팽의 발그스름한 얼굴이 보였다. 상드의 눈에 그의 볼은 장미처럼 싱싱했다. 쇼팽은 상드의 아들 모리스(1823 ~ 1889)와 딸 솔랑주(1828 ~ 1899)를 처음 만났다.
 
당시 스페인은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로니아 지방을 중심으로 왕위계승 전쟁(Carlist War) 중이었다. 그 여파로 국경을 넘는 육로는 막혀있었다. 그들은 배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들어갔다. 그리고 며칠 후 마요르카로 가는 배 ‘엘 마요르킨’에 올랐다. 오후 해지기 직전에 떠난 배는 지중해의 온화한 공기를 뚫고 남쪽으로 나아갔다.
 
차라리 지중해 위의 배가 편안했다. 배는 나아가며 물결을 만들었고 그 물결에 반사되어 나오는 빛 외에는 온통 어두웠다. 조타수를 빼고 배에 탄 사람은 모두 잠들었다. 조타수는 잠을 쫓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선장이 깨는 것이 두려웠는지 노랫소리는 낮고 작았다. 노래라기보다 옹알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어쩌면 반쯤 잠에 취한 조타수의 잠꼬대인 듯도 했다.
 
팔마는 그림 같았고 거리에는 지중해의 향취가 가득했다. 일행은 팔마의 해변 거리를 걸었다. 모두 꿈같은 분위기에 감격했다. 쇼팽은 크게 숨을 들여 마셨다. [사진 pixabay]

팔마는 그림 같았고 거리에는 지중해의 향취가 가득했다. 일행은 팔마의 해변 거리를 걸었다. 모두 꿈같은 분위기에 감격했다. 쇼팽은 크게 숨을 들여 마셨다. [사진 pixabay]

 
다음 날 늦은 오전, 밤새 달려온 배는 마요르카의 항구 팔마에 닿았다. 역시 남쪽이었다. 늦가을 파리의 날씨와 달리 섬에서는 더운 기까지 느껴졌다. 팔마는 그림 같았고 거리에는 지중해의 향취가 가득했다. 일행은 팔마의 해변 거리를 걸었다. 일행은 모두 꿈같은 분위기에 감격했다. 쇼팽은 크게 숨을 들여 마셨다.
 
그러나 이 온화한 지중해의 섬 마요르카의 모습은 곧 돌변한다. 상드가 이 섬을 휴양과 도피의 장소로 선택한 것은 실수였다. 다음에는 쇼팽과 상드 일행의 혹독한 마요르카 생존기가 이어진다.
 
1837년 출판된 쇼팽의 곡 중에는 연습곡 작품번호 25가 있다. 곡은 마리 다구부인에게 헌정되었다. 구성된 12곡 중 첫 번째 곡은 ‘에올리아의 하프Aeolian Harp’ 혹은 ‘목동의 피리’라는 부제로 알려져 있다. 이 짧은 곡을 통해서, 손가락의 기계적 훈련을 위한 연습곡에 담긴 쇼팽의 예술적 미학을 맛볼 수 있다. 겨울바람이라는 부제가 있는 11번째 곡도 잘 알려져 있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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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동섭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필진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 한국인이 좋아하는 고전 음악가 쇼팽. 피아노 선율에 도시적 우수를 세련된 모습으로 담아낸 쇼팽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일생의 연인 상드와 다른 여러 주변 인물에 관련된 일화를 통해 낭만파시대의 여러 단면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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