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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권력 서열 1위 민노총’은 허풍이 아니다

중앙일보 2019.06.28 00:21 종합 31면 지면보기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

“문재인 정권을 끌어내리겠다”는 민주노총의 협박은 허풍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며칠 전 김명환 위원장의 구속에 항의하는 민노총 집회에서 “민주노총을 건드리면 큰일 나게 하겠다”며 나온 말인데 헛소리로만은 들리지 않는다. ‘대한민국 권력 서열 1위는 민노총’이라는 떠도는 얘기가 사실일지 모른다. 전직 대통령과 대법원장도 감방에 보낸 서슬 퍼런 정권에 대고 ‘끌어내리겠다’며 맞짱 뜨는 세력은 대통령 위에 군림하는 ‘권력 서열 1위’밖에 없기 때문이다. 경찰을 두들겨 패도, 회사에서 행패를 부려도, 공공기관을 무단 점거해도 ‘민노총’ 머리띠만 두르면 공권력이 멀뚱멀뚱 쳐다볼 땐 다 이유가 있었다. 예상대로 김 위원장은 구속 6일 만인 어제 구속적부심에서 석방됐다. 이 정부에서 민노총 조합원만 30만 명 늘어 100만 명을 돌파한 것도 이해가 간다. 조만간 좌파 민노총이 극우 태극기부대와 합작해 ‘정권 퇴진’을 외치는 블랙코미디를 볼지 모른다. 도대체 무슨 약점을 잡혔기에 정부가 민노총의 호구(虎口)가 됐는지 따져볼 일이다.
  

‘문재인 정권 끌어내리겠다’는 그들
우스갯소리로 흘려버리지 말아야
좌파 기득권 적폐 극복하지 못하면
‘최고 권력 민노총’ 현실 될 수 있어

촛불정부는 민노총에 빚이 있나
 
김 위원장은 지난해 11월 “민주당은 어떻게 집권 여당이 됐는지 자각하라”고 호통을 쳤다. 엊그제는 단병호 전 위원장이 김 위원장의 구속을 놓고 “민주노총은 촛불항쟁의 힘으로 사실상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켰다”며 정치·도덕적 배반 행위라고 일갈했다. ‘당신들이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데 감히 우리 위원장을 구속하느냐’며 꾸짖는 뉘앙스다. 여기엔 촛불시위를 주도한 민노총이 없었다면 현 정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오만한 인식이 깔려 있다.
 
2016년 10월~2017년 3월의 탄핵 정국과 촛불시위 당시, 민노총의 역할을 부정하긴 어렵다. 동원된 사람과 돈, 무대와 시설, 시위 프로그램, 깃발과 플래카드는 어디서 나왔고, 누가 기획했겠는가. 많은 시민단체와 시민이 가세해 힘을 증폭시킨 점은 맞지만 자금력·동원력·조직력에서 월등했던 민노총이 크게 기여했다. 정치인들은 그들이 깔아준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고 폼 잡은 뒤 정권이라는 꽃가마에 거저 탔다는 게 민노총의 시각이다. 그래서 민노총의 ‘촛불정권지분론’은 그럴듯하다. ‘촛불정부’를 자랑하는 문재인 정부는 민노총의 이런 덫에 걸려 허우적거린다.
 
민노총은 정권 무릎 꿇릴 힘이 있나
 
“문재인 정부와 전쟁을 치를 것”이라는 민노총의 최대 무기는 총파업 투쟁이다. 한국 노동자 2500만 명 중 100만 명만 민노총 조합원일 뿐이다. 숫자로 보면 4%에 불과해 정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순 없다. 하지만 민노총에는 현대차·기아차 등 대기업, 전교조·교수노조 등 교육계, 공무원노조, 언론노조 등 사회 여론을 움직이는 단체가 대거 가입해 있다. 집행부는 탄핵을 비롯해 광우병, 세월호 등 사회적 이슈를 둘러싼 과격시위를 이끌며 싸움에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집권 여당의 최대 관심사인 내년 총선에서 낙선운동 같은 것으로 재를 뿌릴 수도 있다. 3인 가족으로 잡으면 100만 민노총은 300만 표가 된다. 지난 대선 총유권자 수 4200만여 명의 7%에 달한다. 표가 탐나면 찍소리 말라고 할 수 있는 의미의 수치다.
 
굴복이냐 극복이냐
 
정부와 민노총의 한판은 불가피하다. 민노총은 “촛불정권이 아니다”고 결별을 선언했다. 과격한 민노총과 척지면 힘들어진다는 걸 세상은 안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민정수석이던 문 대통령은 화물연대 파업을 계기로 민노총과 틀어진 뒤 줄곧 시달렸던 아픔을 기억한다. “당시 스트레스에 치아를 10개나 뽑았다”는 그의 회고는 악몽이라는 고백이다. 그래서 ‘악마와의 거래’에 유혹을 느낄 만하다. 눈 딱 감고 최저임금 1만원 공약 이행, 탄력근무제 백지화, 실직자의 노조 가입 등 국제노동기구(ILO) 핵심 협약 비준 등을 담은 ‘촛불청구서’에 굴복하면 잠시는 편해진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보자. 그는 해고 요건 완화와 근무시간 유연화를 강행했고, 근로소득세를 줄이는  대신 근로시간은 늘려 “일하는 프랑스”가 되자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노조 천국’ 프랑스에서도 총파업 등 거친 저항과 지지율이 20%대까지 폭락하는 고통이 있었지만 결국 해냈다. 실업률은 10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고 소비·투자가 살아나며 경제가 호전 중이다.
 
탄핵촛불과 정권교체는 시민의 분노와 저항이 만들어낸 것이다. 민노총이 다 했다는 건 억지이자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정부는 갚을 빚 없다고 선언해 촛불청구서 논란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고단한 시절인데 민노총까지 흔들면 대통령의 장악력은 무너지기 십상이지만 그걸 돌파해야 민심이 돌아온다.
 
‘권력 서열 1위 민노총, 2위 검찰, 3위 대통령’이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 누가 뭐래도 민노총은 우리 사회의 최대 기득권 집단이 됐다. 수틀리면 법을 우습게 알고, 정권까지 무릎 꿇리겠다는 게 그들이다. 그런 적폐를 방치하면 장난 같던 ‘최고 권력 민노총’은 진짜 현실이 될 수 있다.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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