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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는 명품 장신구…합죽선, 200년 이상 쓸 수 있죠 "

중앙일보 2019.06.27 10:00
[더,오래] 이정은의 장인을 찾아서(16)
수하 탄주도(樹下 彈奏圖). 여름, 나무그늘 아래서 흑립을 쓴 사대부(표암 강세황 추정)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 부채를 든 이와 탕건을 쓴 청년(제자 단원 추정)이 귀기울여 듣고 있다. 김홍도 작품 속의 부채는 풍류를 즐기는 이에게 기품을 더해주곤 했다. [중앙포토]

수하 탄주도(樹下 彈奏圖). 여름, 나무그늘 아래서 흑립을 쓴 사대부(표암 강세황 추정)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 부채를 든 이와 탕건을 쓴 청년(제자 단원 추정)이 귀기울여 듣고 있다. 김홍도 작품 속의 부채는 풍류를 즐기는 이에게 기품을 더해주곤 했다. [중앙포토]

 
200여 년 전 단원 김홍도 작품에 나오는 부채는 그림에서도 암시해주듯이 예부터 멋과 풍류를 즐기는 이들의 기품 있는 장신구였다. 그때와는 생활문화가 달라진 지금은 보존하고 지켜가야 할 예술품이자 우리의 귀한 유산이다. 부채는 우리말로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물건’이라는 의미로, ‘부치는 채’를 줄인 말이다.
 
고려 이전부터 부채 제작
부채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고려 시대 이전으로 추측된다. 무더운 여름을 대비해 기온이 습해지기 시작하는 하지 전까지만 만들던 생활소품이었다. 지난 하짓날 전주의 김동식 장인(77)을 찾았다. “6월이 제일 한산해요. 습기가 많아서 속에 아교풀이 붙어야 하는데, 안 마르지. 우린 전통 아교만 쓰니까요.”
 
한지에 부챗살을 붙이려는 김동식 장인(77)의 모습. 전통 아교는 습한 날씨에 잘 붙지 않아 6월에는 한산한 편이라고 전했다. [사진 이정은]

한지에 부챗살을 붙이려는 김동식 장인(77)의 모습. 전통 아교는 습한 날씨에 잘 붙지 않아 6월에는 한산한 편이라고 전했다. [사진 이정은]

 
과거 부채는 단순히 더위를 쫓는 용도로만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늘 휴대하면서 남녀노소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도 쓰였다. 여름이 시작되는 단오절이면 선물로 주고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 중국과 일본과의 중요한 국교품이기도 했다. 무더운 여름날 높이 뻗은 대나무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이 대나무에 선자장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수백번 닿으면,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합죽선이 탄생하게 된다.
 
합죽은 합할 ‘합’에 대나무 ‘죽’을 쓴 한자어다. 얇은 대나무 껍질을 합쳐 붙였다는 뜻이다. 즉, 합죽선은 얇게 깎은 겉대를 맞붙여 살을 만든, 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를 말한다. 대나무를 종이처럼 얇게 깎아 맞붙여 부챗살로 만든 합죽선은 휴대성이 뛰어났다. 그리고 산면의 그림이나 글귀로 자신의 품위를 은은하게 드러낼 수 있기에 조선 시대 선비의 소지품이나 선물용으로 사랑을 받았다.
 
천연염색선(40살, 천연염색한지, 흑단, 낙죽). [사진 이정은]

천연염색선(40살, 천연염색한지, 흑단, 낙죽). [사진 이정은]

옻칠선(40살,옻칠한지,대추나무,낙죽). [사진 이정은]

옻칠선(40살,옻칠한지,대추나무,낙죽). [사진 이정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채는 선풍기의 보급 등으로 점점 수요가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제작을 중단하는 부채 장인도 늘었다. 그런 가운데 지금까지 5대째 잇고 있는 장인 부자, 국가무형문화재 선자장 김동식 장인(77)과 김대성 장인(44)은 꿋꿋하게 우리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부채의 산지로 전주가 유명해진 것은 뛰어난 품질의 종이와 대나무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 임금님께 진상할 부채를 만드는 선자청이 전주에 생긴 이후 지방에 거주하던 선자장이 모여들어 공방을 형성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재료의 공급, 부채의 납품과 수급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며 좋은 부채를 만드는데 피와 땀을 흘렸다.
 
“14살 때 외조부인 라학천 합죽선장에게 처음 합죽선 만드는 것을 배운 이후 올해로 63년 세월 동안 합죽선에 온 인생을 바쳤어요. 사람들이 현대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질 때 어떻게 하면 우리 전통의 방식을 지킬지가 인생의 숙제였죠.”
 
장인의 외증조부 고 라경옥 합죽선장. [사진 이정은]

장인의 외증조부 고 라경옥 합죽선장. [사진 이정은]

윤선(50살, 한지, 화덕목, 낙죽). [사진 이정은]

윤선(50살, 한지, 화덕목, 낙죽). [사진 이정은]

 
외조부 라학천은 고종황제에게 합죽선을 진상할 만큼 빼어난 솜씨를 가졌다고 한다. 2007년부터 12년 동안 아버지 일을 돕고 있는 김대성 장인(44)이 옆에 있었다. “단순히 제 욕심으로 전통의 맥이 끊기지 않게 아들까지 힘을 합쳐 하고 있는데, 점점 수요가 줄어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는 분야라 내 선택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그래도 부채를 지금까지 만들어오면서 가장 뿌듯한 게 뭐냐고 물었다. “지금도 서울 인사동에 한여름 놀러 가보면 우리 전주 부채를 들고 다니면서 더위를 이겨내는 분을 뵈면 감사하죠. 사실 인사동에서 파는 싼 부채들은 99%가 중국산인데도, 진짜를 알아보고 사용하는 분을 발견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김 장인은 2007년 지역 인간문화재로 선정됐다. 2013년부터 부채의 가치가 점점 잊혀가는 것이 속상해 국가무형문화재 타이틀을 받기 위해 1년 8개월 정도 서류를 만들어서 넣었다. 서류 심사가 1년 걸렸고, 15일 동안 부채를 만드는 시연을 했지만, 심사위원단의 검증 단계가 꽤 오래 걸렸다. 2015년이 돼서야 비로소 국가무형문화재가 되었다.
 
선풍기와 에어컨이 생산되면서 점차 부채 소비량이 줄기 시작했다. 선풍기는 생활에 편리함을 주긴 하지만, 부채 고유의 전통문화와 기품을 잇지는 못한다. 사진은 금성사의 1970년대 선풍기.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선풍기와 에어컨이 생산되면서 점차 부채 소비량이 줄기 시작했다. 선풍기는 생활에 편리함을 주긴 하지만, 부채 고유의 전통문화와 기품을 잇지는 못한다. 사진은 금성사의 1970년대 선풍기.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1972년 금성사에서 선풍기가 나오기 시작해 저도 선풍기를 샀어요. 80년대 말엔 에어컨이 등장해 당연히 부채의 수요가 줄더라고요. 너무 당연해요. 저 역시 생활은 편리해졌는걸요. 하지만, 부채의 본질이 단순히 더위만 식혀주는 것이 아닌데, 우리의 전통문화가 잊혀 가니 안타깝더라고요. 70년대 이후론 생활도 점점 어려워졌지만 가업이라 포기할 수 없었어요.”
 
김동식 선자장이 부채 제작을 시작한 1956년 당시 합죽선은 크게 대사십, 중사십, 소사십, 중삼십으로 분류됐다. 대사십은 부채의 키가 30cm, 부챗살이 40살인 부채를 말하고, 주로 60~70대 남성이 사용했다. 중사십은 부채의 길이가 27cm, 살이 40살인 부채로 40~50대 남성이 들고 다녔다. 키 25cm에 살이 40살인 여성용 부채가 소사십이다. 중삼십은 키 30cm, 살 30세의 까만 옻칠을 한 부채로 주로 창을 하는 사람이 들고 다녔다.
 
“보통 부채 1점 만드는데 15일 정도 걸려요. 재료 준비까지는 더 걸리고요. 가업의 명예를 걸고 지금까지 내 손에서 만든 작품은 세계 어디 내놓아도 자랑할 정도가 되어야 하죠. 제가 만든 합죽선에는 크게 대나무껍질, 손잡이 나무(대추나무, 먹감나무), 전주부채전용한지(합죽지) 3가지 재료가 필요합니다. 시간이 지난 뒤 종이를 갈아 끼우고 물기, 너무 뜨거운 것만 피하면 200~300년도 가요.”
 
70년대엔 없어서 못 팔아
합죽선 제작도구들(위)과 대나무 껍질을 자르는 모습(아래). 한국은 전통 부채를 만들 때 대나무 껍질을 사용해 오래 쓸 수 있다. [사진 이정은]

합죽선 제작도구들(위)과 대나무 껍질을 자르는 모습(아래). 한국은 전통 부채를 만들 때 대나무 껍질을 사용해 오래 쓸 수 있다. [사진 이정은]

 
일본이나 중국은 대나무 속을 가지고 만드는데, 한국은 껍질로만 만든다. 장점은 반영구적이다. 대나무껍질은 수분을 안 빨아들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격대는 개당 10만원부터인데, 재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장인은 들어가는 재료비와 인건비보다 판매가격을 많이 못 받아 속상해했다.
 
70년대 부채 사업이 정말 잘 됐다. 전주에서만 부채가 4만 5000개가 나왔지만 금방 동이 났다. 요즘은 전국적으로 1만 개가 나와도 다 못 판다고 한다. 아들 김대성 장인은 고등학교와 전문대학교에서 기계 관련 공부를 했다. 졸업 후엔 전공 관련 일을 했지만, 결혼 후엔 아버지 일을 도와 합죽선 만드는 일을 하기 시작했다.
 
“2015년 본격 합죽선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시작할 때 이런저런 생각도 많았는데, 지금은 합죽선 만드는 일에 중독될 정도로 재미를 느낍니다. 합죽선은 똑같아 보이지만 정밀하게 따지면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어요. 합죽선이 완성된 후 그 모양이나 기능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하려는 마음이 작업하는 긴 시간을 짧게 느끼게 합니다.”
김대성 장인(44)과 김동식 장인(77) [사진 이정은]

김대성 장인(44)과 김동식 장인(77) [사진 이정은]

김대성 장인(왼쪽)과 김동식 장인(오른쪽)이 작업하는 모습. 세심하게 공들여 작업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한다. [사진 이정은]

김대성 장인(왼쪽)과 김동식 장인(오른쪽)이 작업하는 모습. 세심하게 공들여 작업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집중한다. [사진 이정은]

 
전주는 예부터 합죽선을 만들 때 40개의 부챗살을 만드는 초 주방, 정 연방, 때를 빼내고 빛이 나게 하는 광방, 합죽한 부채에 인두로 무늬를 새겨 넣는 낙중방, 부채에 한지를 바르는 도배방, 부채의 목을 묶는 사북방으로 분업화할 만큼 부채산업이 발달했다. 합죽선 제작 공정이 그만큼 전문적이고 여러 단계의 공정이 필요해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는 뜻이다.
 
부자의 소망은 작업실의 크기가 조금 넓어졌으면 하는 것이라고. 지금은 집안의 방 한편을 쓰고 있는데, 나라에서 지정한 무형문화재에 제작 장소를 제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주부채문화관에서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김동식 장인의 기획전을 볼 수 있다.
 
이정은 채율 대표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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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이정은 채율 대표 필진

[이정은의 장인을 찾아서] 인간문화재 등 최고 기술의 장인이 만든 최고급 전통공예품을 제조하고 유통한다. 은퇴 후 전통공예를 전수할 문하생을 찾고 있다. 시간과 노력은 많이 들지만 은퇴 이후가 아니면 전통예술을 배울 기회는 흔치 않다. 지방 곳곳에 있는 인간문화재 등 장인을 소개하고, 은퇴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 재취업으로 연결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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