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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 "괴물이란 시 …너무 늦게 써서 미안했다"

중앙일보 2019.06.25 18:32
6년 만에 새로운 시집을 출간한 최영미 시인 [사진 중앙포토]

6년 만에 새로운 시집을 출간한 최영미 시인 [사진 중앙포토]

"저는 제 글에 자신이 있어요.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지금까지 저를 이끌어왔습니다. 고립무원에서 ‘그의 사람들’ 틈에서 싸우면서도 온전한 정신으로 지금까지 온 것은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 문단 기득권층의 성폭력 행태를 고발하며 문학계 ‘미투(Me Too) 운동’을 촉발한 최영미(58) 시인이 6년 만에 신작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이미출판사)로 돌아왔다. 이번 시집에는 고은 시인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미투 운동을 촉발한 계기가 됐던 '괴물'을 포함해 '독이 묻은 종이' '여성의 이름으로' 등 미투와 관련된 시 다섯 편 등 약 50편이 수록돼 있다.
 
‘내가 아니라 우리 / 너가 아니라 우리 / 싫어도 우리, 라고 말하자/(중략) 어머니라는 / 아내라는 이름으로 / 노예 혹은 인형이 되어 / (후략)’ (‘여성의 이름으로’ 일부) 
 
'En 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 문단 초년생인 내게 K 시인이 충고했다 /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중략) 자기들이 먹는 물이 똥물인지도 모르는 / 불쌍한 대중들' ('괴물' 일부)
고은 시인(왼쪽), 최영미 시인. [중앙포토·연합뉴스]

고은 시인(왼쪽), 최영미 시인. [중앙포토·연합뉴스]

 
시인은  25일 서울 동교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괴물'이란 시에 대해 "2017년 9월 문예지 『황해문화』에서 젠더 이슈에 관한 시를 청탁받고 쓴 시였다"며 "청탁을 받고 난 후 당시 할리우드에서 미투 운동이 벌어졌고, 이제 이야기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마지막까지 겁이 많아서 주변에 보내도 될까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워낙 사회적 파장이 컸던 시를 발표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느냐고 묻자 "없다. 오히려 시를 쓰면서 너무 늦게 쓴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고 했다. "2016년 가을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이 시작됐고, 고양예고 졸업생들이 배용제 시인의 성폭력을 고발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나도 시를 발표할 용기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시집을 낸 이미 출판사는 작가가 직접 차린 곳이다. "지난해 시집을 내고 싶어 출판사에 의사를 물었지만 답이 없었어요. ‘이제 한국 문학 출판사에서 내 시집 내는 걸 부담스러워 하는구나’ 깨달았죠. 제가 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심하고 지난 4월 사업자등록을 했어요. 제 몸에서 시인의 피를 빼고 사업가의 피를 갈아 넣는 느낌이었어요.”   
 
이번 시집에는 작가가 등단 직후인 1993년 『민족문학작가회보』에 발표했던 '등단 소감'이라는 시도 실려 있다. 이 시에서 작가는 "내가 정말 여, 여류시인이 되었단 말인가 / 술만 들면 개가 되는 인간들 앞에서 / 밥이 되었다, 꽃이 되었다 / 고, 고급 거시기라도 되었단 말인가"라며 당시 문단에 팽배했던 성추행ㆍ성희롱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 최 시인은 "등단 직후 문단 술자리에서 내가 느낀 모멸감을 표현한 시다. 가만히 서 있으면 뒤에서 엉덩이를 만지고 성희롱 언어들이 무성했다"며 "지금껏 시집에 싣고 싶었지만, 주변의 만류로 그러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작년 봄 이후로 '왜 그걸(성폭력 사건) 지금 말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침묵했던 것이 아니고 작가로서 표현했지만 시집에 넣지 못했을 뿐이다. 오해받고 싶지 않아서 이번 시집에 게재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시집에는 고은 시인과 진행 중인 명예훼손 소송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시 '독이 묻은 종이'도 실려 있다. 앞서 시인은 고은 시인으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했다. 1심에서 승소했지만, 현재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최 시인은 "재판하면서 내가 너무 쪼그라들었다. 재판에 영향을 끼칠까 봐 이번 시집처럼 검열한 적이 없다. 처음으로 변호사에게 시집 원고를 보내 검토를 받고 시를 몇 개 빼기도 했다"며 눈물을 보였다.  
 
시집엔 연애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간병하며 어머니의 배변을 보고 기뻐하는 이야기 등 일상에 대한 시편들도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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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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