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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함 대신에 붙잡은 질문… "당신은 지금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중앙일보 2019.06.25 05:00

“'내가 20대의 새파란 청년들보다 훨씬 더 판사로서의 자질이 있는데, 그 이유가 아이를 네 명이나 키워봤고, 30대 후반이고 세상 풍파를 더 풍부하게 겪었다’는 것이잖아요. 주부의 이력, 늦게 시작한 것, 고생을 해 본 것 모두 자기 삶의 자산으로 받아들인 것이죠. 이런 삶의 태도가 멋있다고 생각해요.”

_장영은 문학연구자, 폴인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중에서
 
네 명의 자녀를 키운 30대 후반,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태영은 한국 여성 최초의 변호사가 됐다. 그는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가정볍률상담소의 전신)를 만들어 법으로 불평등을 부수기 위해 노력했다. [중앙포토]

네 명의 자녀를 키운 30대 후반,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태영은 한국 여성 최초의 변호사가 됐다. 그는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가정볍률상담소의 전신)를 만들어 법으로 불평등을 부수기 위해 노력했다. [중앙포토]

[폴인을 읽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이 자꾸 물어봤어요. 꿈이 무엇이냐고요. 
 
그 질문에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를 잘해야 하고 품행이 ‘방정’해야 한다는 등의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과외 도중 학생이 “선생님, 꿈이 뭐에요?”라고 물어봤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숱하게 자기소개서를 썼지만,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아마도 제가 고민했던 것은 꿈이 아니라 어른들이 좋아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방법이 아니었을까요. 문득 왜 사람들이 꿈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좋아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러다 꿈이라는 것이 현실의 반대급부 정도를 얕게 감싸고 있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팍팍한 현실을 얄팍하게 덮어주는 단어가 꿈이라는 것이죠.
 
다른 사람들의 현실은 모르지만, 제 현실은 이렇습니다. 오전 7시에 집을 나와서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난 후, 밤 11시가 다 되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강대교의 야경을 보며 서글픈 감성을 가득 안고 생각에 잠기곤 합니다. 열심히 살면 저 불빛 중 하나는 가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정류장에 내린 후, 2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는 오르막길을 오릅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 하나에 의지하며, 가쁜 숨을 고르며 느릿느릿 집으로 향합니다. 이 오르막길은 참 많은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독감으로 심하게 아팠던 날, 119를 불렀더니 구급차가 들어오지 못해서 제 발로 기어 내려갔던 기억, 엄마가 서울에 올라왔던 날에도 차마 보여주지 못하고 다른 곳을 갔던 기억을 품고 있습니다. 또, 같이 사는 친구와 술에 취해서 언젠가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살자고 다짐하며 올라왔던 기억도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어느 날 문득 아득해졌습니다. 무사히 서른 살이 될 수 있을지 궁금해졌거든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 살 수는 없어도, 번듯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 지금의 삶이 준비 과정에 불과해지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창피하게도 꿈이 ‘직장인’이어서 지금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싫었습니다. 
 
그때부터 소위 말하는 성장통이라는 것이 시작됐습니다. 어디에 취직할지보다 제 삶을 어떤 단어로 수식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언니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언니의 말을 듣고 한 대 맞은 듯했습니다. 자기는 ‘지금’ 잘 살고 싶어서 목소리를 내는 거라는 말이었죠. ‘지금 잘 살기’는 정말이지 중요한 문제니까요. 
 
명함 한장을 위해서 20대의 제가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될 이유는 없었습니다. 만약 갑작스레 죽음을 맞는다면, 명함 속 글자로는 제 삶이 설명되지 않을 테니까요. ‘지금’ 잘 살기 위해 고민하는 주변 사람들 덕에 제 삶은 바뀌었습니다. 숨을 어디서 내쉬는지, 어디서 숨을 못 쉬겠는지도 알게 되었고요. 주변의 평가보다 내면의 목소리에 좀 더 귀 기울이는 연습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끔 불안해요. 어떻게 해야 ‘잘’살 수 있는 건지 생각하는 사람은 늘 고민하기 마련이니까요. 
 
폴인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 시리즈 중 가장 좋았던 것은 이태영 변호사의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한국 여성 최초 변호사로, 호주제 폐지에 밑그림을 그렸던 선각자입니다. 이태영 변호사는 여성으로서의 자아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로서 부와 명예가 있는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그는 똑똑한 올케 언니를 통해 기혼 여성의 처지를 보았고 자신의 주부 이력을 경력 단절이 아니라 법조인으로서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여성 법조인으로서 가족법 개정 운동을 줄기차게 이어나갔습니다. 언젠가 여성이 이혼해서도 혼자 아이를 키울 수 있고 자신의 성을 물려줄 수도 있으며, 딸도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확신하면서요.
 
폴인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의 표지. [사진 폴인]

폴인 스토리북 <여자, 최초가 되다>의 표지. [사진 폴인]

 
제 속에는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 싶은 마음과 특별한 사람으로 대접받으며 잘 살고 싶은 바람이 공존합니다. 저를 둘러싼 불평등과 약자의 입을 막는 구조를 보면서도, 때때로 그를 외면하고 위로 올라가 좀 더 잘 살고 싶습니다. 그 외면 속에는 지방 출신, 여성, IMF 이후의 청년 세대라는, 어렵게 하나씩 깨달아간 제 정체성이 포함되어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외면하고 얻게 되는 것이 알량한 ‘사회인’ 혹은 번듯한 기업의 ‘직장인’이라는 이름표라면, 저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한평생 살고 싶습니다. 그 이름표는 언제든지 자의가 아니라 타의로도 떨어질 수 있으니까요.
 
특히 좋았던 것은 그의 자서전 이야기였습니다. 이태영 변호사의 자서전 제목은『나의 만남, 나의 인생』입니다. 자신과 타인의 관계와 사건으로 책을 엮은, 일종의 자전적 교유록입니다. 보통 자서전의 주어가 ‘나’인 것을 생각해보면 그는 인생에서의 중요한 ‘만남’을 주어로 둔 것입니다. 장영은 문학연구자는 <여자, 최초가 되다>에서 “삶이라는 건 ‘내가 누구를 만나서 무엇을 하고 그 사람들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한 기록인지도 모르겠습니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이 제일 좋았습니다.
 
주변의 사랑하는 이들과 어떤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살아가는지를 생각해보면, 저는 퍽 잘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분노의 에너지이든, 슬픔의 에너지이든 간에 저는 ‘지금’의 감정을, 생각을, 삶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스스로가 잘살고 있는지 궁금해지면 저 자신에게 물어볼 참입니다. 모호한 미래를 담은 꿈이 아니라 지금 누구를 만나고 있냐고 말입니다. 누구를 만나고 있냐는 질문은 “나는 누구를 만나고 싶은가”혹은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담고 있으니까요. 저도 여러분께 물어보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만나고 있습니까.
 
김아현 객원 에디터 folin@folin.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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