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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준의 골프인사이드] 박세리와 소렌스탐, 웹…20년 뒤 그들의 대리전

중앙일보 2019.06.25 00:04 경제 6면 지면보기
호주 여자골프의 전설 카리 웹(가운데)이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한나 그린(웹 오른쪽)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왼쪽은 호주동포 오수현. [USA TODAY=연합뉴스]

호주 여자골프의 전설 카리 웹(가운데)이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한나 그린(웹 오른쪽)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맨 왼쪽은 호주동포 오수현. [USA TODAY=연합뉴스]

박세리(42)는 2001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5승을 거뒀다. 그런데도 LPGA 최고 선수가 되지 못했다. 안니카 소렌스탐(49·스웨덴)이 무려 8승을 했기 때문이다. 2000년 7승을 거두며 최고 자리에 올랐던 카리 웹(45·호주)은 2001년엔 3승에 그쳤다. 웹은 “내년에도 소렌스탐이 8승을 한다면 내 모자를 씹어 먹겠다”고 했다. 이듬해 소렌스탐은 8승을 하지 않았다. 11승을 했다.
 
한나 그린(23·호주)이 24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인근 헤이즐틴 골프장에서 끝난 LPGA 투어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합계 9언더파로 우승했다. 끝까지 추격하던 박성현(26)을 1타 차로 제쳤다. 우승 상금은 57만7500달러(약 6억7000만원).
 
올해 여자 PGA 챔피언십은 박세리, 소렌스탐, 웹의 대리전 같았다. 메이저 7승의 카리 웹은 그린의 우승이 확정되자 맥주 거품을 뿌리면서 마치 자신의 여덟 번째 메이저 우승인양 좋아했다. 그린은 웹의 장학생이다. 웹은 뛰어난 호주 선수들을 격려하고 매년 두 명씩 미국에서 열리는 큰 대회에 초청한다. 그린은 2015년 웹을 따라서 US오픈을 참관했다. 그 덕분에 미국 무대의 꿈을 꿨고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도 했다. 그린은 “웹과 함께 지내면서 대선수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골프에 대해 인사이트를 얻게 됐다”고 했다. 그린은 4년이 지난 올해는 선수로 출전해 웹과 같은 숙소에 머물며 연습 라운드를 함께 했다. 웹은 컷 탈락한 뒤에도 끝까지 남아 그린을 응원했다.
 
2위를 한 박성현을 비롯, 우승 경쟁을 펼친 김세영, 박인비, 김효주 등 한국 선수들은 박세리 키즈다.
 
박세리, 소렌스탐, 웹(왼쪽부터)

박세리, 소렌스탐, 웹(왼쪽부터)

챔피언조에서 출발한 아리야 주타누간(태국)은 소렌스탐이 현역 시절 강력한 팀을 구성했던 멘털 코치 피아 닐슨, 린 매리엇의 제자다. 소렌스탐은 주니어 시절, 인터뷰가 두려워 일부러 마지막 홀에서 보기를 해 1등을 피한 적도 있다.
 
닐슨과 매리엇은 그 수줍은 많은 소녀 소렌스탐을 여제로 만들었다. 닐슨이 가르친 ‘두려움에 맞서자’ ‘비전 54(모든 홀에서 버디)’라는 구호를 모자챙에 써놓고 다녔다. 피아 닐슨은 주타누간을 제2의 소렌스탐으로 키우려 한다. 소렌스탐도 주타누간을 격려한다.
 
여자 PGA 챔피언십에서 그린이 우승할 것으로 본 전문가는 거의 없었다. 대회가 열린 헤이즐틴 골프장은 전장은 길고, 페어웨이는 넓으며, 러프가 별로 길지 않게 세팅됐다. 그래서 대회전부터 ‘장타자의 천국’으로 불렸다.
 
그린은 LPGA 투어 2년 차로 메이저 대회는커녕 일반 대회 우승 경험도 없었다. 세계랭킹은 114위였다. 샷 거리가 길지 않은 그린은 아리야 주타누간, 박성현, 김세영, 넬리 코다 등 장타자들의 추격권에서 경기했다. 어린 사슴이 맹수들에게 쫓기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린은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다. 마지막 홀에선 4번 아이언으로 힘겹게 그린 근처 벙커에 가서 파세이브를 하며 우승했다. 함께 따라다닌 멘토 웹의 응원이 큰 힘이 됐다.
 
소렌스탐, 웹, 박세리는 모두 한 시대를 풍미한 선수들이다. 그들은 동시에 LPGA투어에 출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소렌스탐은 72승(메이저 10승), 카리 웹은 41승(메이저 7승), 박세리는 25승(메이저 5승)을 거뒀다. 소렌스탐이라는 엄청난 선수와 동시대에 활동한 박세리와 카리 웹은 불운하기도 했다. 반면 팬들에게는 더욱 흥미로웠다. 웹이 “모자를 씹어먹겠다”고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골프 팬들과 후배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아직도 그들이 대리전을 치를 수 있는 이유다.
 
이번 대회에서는 ‘웹의 아이’ 그린이 우승했지만, 빅3의 은퇴 후 승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올해 첫 두 메이저 대회에선 박세리 키즈인 고진영, 이정은6가 우승했다. 소렌스탐의 영향으로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에서도 뛰어난 선수들이 등장하고 있다.
 
앞으로도 세 선수의 영감을 얻은 선수들이 뜨거운 경쟁을 펼칠 것이다. 기간이 꽤 길어질 수도 있다. 우승자인 그린은 “만약 카리 웹이 후배들을 위한 지원을 중단하게 되면 내가 이어받고 싶다. 선배들의 기술을 전하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성호준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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