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본문

탐사하다

10월 출소할 성폭력범, 피해 소녀 바뀐 주소·전화번호 안다

중앙일보 2019.06.24 18:00 종합 8면 지면보기
2016년 10월, 고3이었던 희정이(가명·당시 18)에게 그날 밤은 지옥이었다. 만취한 친부 김모씨가 희정이를 성추행했다. 평소에도 손찌검을 당하던 희정이는 공포에 질려 반항조차 못 했다.

 
이를 알게 된 희정이 엄마가 경찰에 신고했다. 법원은 김씨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부모는 갈라섰다. 모녀는 그곳에 더 머무를 수 없었다. 이삿짐을 꾸렸다.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주거 지원을 해줬다.

 
막상 이사했지만 새로운 곳에 뿌리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더 이상 사람을 믿을 수 없고,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겁이 났다. 위축되고 의기소침해지곤 했다. 그러던 차 기막힌 소식이 들려왔다. 김씨의 가족들이 퍼뜨린 악담이다. “사기꾼이 아이를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고 한다.”
 
최근엔 예전 동네에 사는 지인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 “김씨 가족 중 한 명이 나와 대화하며 ‘희정이네, 지금 ○○동에 이사가서 잘 살고 있다며?’라고 정확히 주소까지 대더라.” 김씨의 보복이 두려워 휴대전화 번호까지 바꿨지만 김씨 가족은 희정이의 바뀐 번호를 알고 있었다.
 
성범죄자는 대개 출소 후 어느 곳이든 제약 없이 활보할 수 있는 반면, 성범죄 피해자는 트라우마와 보복 우려에 시달리며 기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사하기를 희망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앙포토]

성범죄자는 대개 출소 후 어느 곳이든 제약 없이 활보할 수 있는 반면, 성범죄 피해자는 트라우마와 보복 우려에 시달리며 기존 삶의 터전을 버리고 이사하기를 희망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중앙포토]

김씨는 오는 10월이면 출소한다. 김씨 범행의 법정 하한형은 징역 5년이었지만, 재판부가 “잘못을 반성하고 있다”며 하한형보다 낮은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해서다. ‘피해자 접근 금지’ 등 준수사항도 없다. 출소 후 김씨가 원하면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다. 희정이네를 찾아올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이미 주소도, 전화번호도 아는 터다.

 
“희정이는 벌써 그가 출소 뒤 자신 앞에 나타날까 봐 극심한 불안·우울 증세를 호소하고 있다. 하루는 약을 가리키며 ‘이걸 얼마나 먹으면 죽을 수 있느냐’고 하더라.”

 
희정이 엄마가 24일 ‘탐사하다 by 중앙일보’에 울먹이며 한 얘기다. “희정이를 볼 때마다 내가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몰려와 견딜 수 없다”고도 했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던 희정이 엄마는 사건 여파로 건강이 나빠져, 지금은 희정이가 홀로 일하며 어머니와 학생인 남동생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성범죄 가해자는 출소한 뒤 어느 곳이든 활보할 수 있는데 오히려 피해자들이 보복 우려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기존 삶의 터전에서 밀려나는 게 현실이다. 황지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피해를 본 이들이 또다시 이주해야 하는 모순에 대해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슬기(24·가명)씨도 희정이네와 비슷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 2013년 18세이던 슬기씨는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은 뒤 이모네 집에 들어가 살게 됐다. 이모부 박모씨는 용돈을 주며 성관계를 요구했다. “미성년자를 정신적 지배 아래 두고 저지른 전형적인 ‘그루밍 성범죄’”(범죄피해자지원센터 관계자)였다. 결국 박씨는 징역 5년형을 받았고 2022년 출소한다. 지금은 혼자 사는 슬기씨로선 박씨가 찾아온대도 막을 방법이 없다.

 
관련기사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신진희 변호사(법률구조공단 피해자 국선 전담)는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는 사건 발생 단계에서 나타난 불안감이 피의자 구속 및 재판 단계에서 다소 누그러졌다가, 가해자의 출소일이 다가오면 또다시 증폭되는 게 사실”이라며 “이사를 희망하지만, 학교·직장 등 사회적 관계망이나 열악한 경제적 여건 때문에 실제 이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전국 각지에 설치된 58곳의 범죄피해자지원센터가 이러한 환경에 놓인 피해자와 그의 가족을 위해 주거지원을 하고 있지만, 지원 과정이 까다롭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국민·매입·전세임대주택 형태로 지원하는데 ▶무주택자 ▶전년도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의 50% 이하 조건부터 충족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2009~2018년 10년간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주거지원은 520건(약 4억2300만원)에 불과하다. 이중 아동·청소년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주거지원은 235건(약 1억8000만원)이다.
 
올해 들어 피해자 주거지원에 쓰이는 예산도 줄었다. 2019년 법무부 기금운용계획에 따르면 범죄피해자보호기금의 ‘범죄피해자 치료 및 자립지원’ 항목은 지난해 211억8900만원에서 올해 196억2000만원으로 약 7.4% 감소했다.
 
탐사보도팀=유지혜·정진우·하준호 기자 wisep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