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용퇴(勇退)’라는 폐습

중앙선데이 2019.06.21 16:17
 독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중앙SUNDAY 편집국장 김종윤입니다. 한국에서 힘 있는 집단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기수(期數) 문화’ 입니다. 누군가가 그 집단의 대표가 되면 같은 기수 동료나 앞 기수 선배는 모두 퇴진합니다. 기수가 곧 서열입니다. 폐쇄적인 집단일수록 엄격합니다.
 
대표적인 곳이 검찰과 국세청입니다. 검찰총장이나 국세청장이 임명되면 동기나 선배 기수가 물러나면서 내세우는 명분은 신임 총장(또는 청장)이 소신껏 조직을 이끌도록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것입니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사 [중앙포토]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사 [중앙포토]

윤석열 서울중앙지검장(사법연수원 23기)이 검찰총장 후보로 지명되면서 윤 후보자보다 선배 기수인 검찰 간부들이 잇따라 사표를 내거나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김현준 국세청장 후보자(행정고시 35회)가 인사청문회를 거쳐 정식 임명될 즈음 김 후보자와 동기 또는 선배 기수인 국세청 관료도 물러날 것으로 보입니다.  
  
두 기관은 법과 세제를 집행하기 때문에 상명하복(上命下服)의 문화가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 운영의 규율이 엄격한 이유입니다. 검찰의 경우 ‘검사동일체 원칙’이라는 게 검찰청법에 있었습니다. ( 이 조항은 2003년 검찰청법 개정으로 삭제됐습니다만 지금도 검사가 상급자의 지휘 감독을 존중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들은 퇴임해도 변호사나 세무사라는 전문직으로 활동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 시절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미련 없이 용퇴라는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측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직된 집단 문화가 과연 사회 공익을 수호한다는 가치에 맞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이들은 20~30여년간 나랏돈을 봉급으로 받으면서 지식과 경륜을 쌓았습니다. 업무처리 능력과 판단 능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순전히 총장과 같은 기수 또는 선배 기수라는 이유로 고급 인력이 사표를 쓰고 공공부문을 떠나는 건 국가적으로 손해입니다.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중앙포토]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중앙포토]

이런 비판은 새 검찰총장이 임명될 때마다 되풀이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문제를 고치자는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일부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2011년 한상대 검찰총장이 임명되자 사법연수원 13기 동기생 5명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동반퇴진했습니다. 비판이 제기되자 후속 검사장급 인사 때 동기 또는 후배에 밀려 승진을 못 한 간부들이 사퇴하려는 걸 당시 지휘부가 설득해 막았습니다.  
 
하지만 이때뿐이었습니다. 검찰의 오랜 폐습은 질긴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공직에서 더 헌신할 수 있는데 기수 문화 때문에 무조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면 다음 시나리오는 무엇이겠습니까. 선배가 마치 통 크게(?) 자리를 비워주는 것으로 포장되고 그 대가는 전관예우로 돌아오는 것 아닐까요. 의리라는 철 지난 관념에 똘똘 뭉친 조직에서 선배가 민ㆍ형사 사건 피의자의 변호인으로 등장하면 후배는 엄격하게 법을 집행할 수 있을까요.          
 
검찰 안에는 총장에게 직언도 하고 토론도 할 수 있는 동기나 선배 기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강고해지고, 위상도 높아질 수 있습니다. 폐쇄적인 기수 문화가 개인의 진퇴를 결정하는 건 시대착오적 관행입니다. 법 집행기관도 다양성을 지향해야 합니다. 민간 기업이나 단체는 이미 입사 기수와 연공서열의 장벽을 깨고 다양성과 창의성의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

미세먼지 심한 날엔? 먼지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