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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난봉꾼 마틴 루서 킹

중앙일보 2019.06.20 00:03 종합 31면 지면보기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지난달 말 공개된 7800단어 분량의 글이 있습니다. 한 지도자에 대한 고발문입니다. 이에 따르면 종교인인 그는 도시마다 통정하는 여인을 둔 난봉꾼이었습니다. 40명이 넘었습니다. 때론 난잡한 모임도 했습니다. 동료 종교인이 부적절한 요구를 뿌리치는 여인을 성폭행할 때도 그는 지켜봤을 뿐입니다. 때론 웃고 때론 말을 보태며 말입니다.
 
맞습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입니다. 글이 사실이라면, 모두가 자유로워지는 세상을 꿈꾼 그는 실상 ‘죄인’이었습니다. 민권 운동계의 하비 와인스타인이었던 겁니다. 과연 사실일까요?
 
저자는 킹 목사의 전기를 써서 1987년 퓰리처상을 받은 역사학자입니다. 이번엔 미 연방수사국(FBI)이 공산주의자들을 감청하는 과정에서 채록한 킹 목사 녹취록의 발췌본을 사료로 삼았답니다. 지난해 공개된 자료입니다. 킹 목사를 흠모했던 저자는 FBI의 불순한 행태(도청)를 고발하려다 되레 킹 목사를 고발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자, 이로써 20세기 미국의 도덕적 토템은 쓰러지는 걸까요? FBI의 의도는요? 주장의 폭발성·민감성 때문에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물론이고 영국의 가디언은 저자의 투고 제안을 뿌리쳤다지요. 그렇다고 외면한 게 옳았을까요? 글은 결국 지난달 말 영국의 작은 잡지에 실렸습니다.
 
이후 전개되는 논쟁을 보며 다시 느낍니다. 흠이 있는 이도 옳은 일을 할 수 있고 옳은 일을 했음에도 대단한 흠이 있는 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인간성은 복잡하며 인간계도 복잡합니다. 오로지 흑, 오로지 백은 가상현실(때론 진영 사고)에서나 존재하지요. 누구나 판관이 될 수 있지만 제대로 판단하기란 어렵습니다. 겸허할 일입니다. 그나저나 킹 목사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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