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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고추가 못 서" 텃밭 구경 와 음담패설하던 할매들

중앙일보 2019.06.19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93)
내가 예전에 살던 집은 길가에 자리 잡아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곤 했다. 농사를 지을 때면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일을 도왔다. 사진은 전남 금곡마을 주민들이 품앗이를 하면서 벼를 베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내가 예전에 살던 집은 길가에 자리 잡아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곤 했다. 농사를 지을 때면 마을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일을 도왔다. 사진은 전남 금곡마을 주민들이 품앗이를 하면서 벼를 베고 있는 모습. [중앙포토]

 
15년 전 내가 시골에 내려가 살았던 집은 길가에 지은 농가주택이었다. 집 옆에 거의 백 미터가량 길을 따라 길게 붙은 문전옥답이란 이름의 밭도 있었다. 첫해에 고추 500포기를 심는데 동네 사람들이(7명) 모두 나와 거들었다.
 
아마도 남편이 아침마다 운동 길에 선전하고 다닌 듯했다. 둘이서 소꿉놀이하듯 심으려고 계획한 생각은 물 건너갔다. 한 시간도 안 되어 끝나버렸다. 길가 한쪽엔 남편이 벌려놓은 막걸리 좌판이 지나가는 분들을 붙들어 세웠다. 남자들은 술 한 잔 인심에 밭둑에 걸터앉아 팔을 휘저으며 취중 감독을 했다.
“아이고~ 소물다 소물다~~”(심는 폭이 좁다는 뜻).
 
남편은 옆에서 막걸리 따르던 손을 같이 휘저으며 소리쳤다….
“소물단다. 벌리 심어라~~”
그러면 모두 간격을 더 벌려서 심었다.
 
또 어느 분이 지나가다 막걸리 한잔 마시고는
“보소 보소~ 드물다 드물다~”(심는 폭이 너무 넓다는 뜻)하면 또 재방송이 되고 후딱 폭을 좁혀 심었다. 그것은 막걸리값을 해야 한다는 농심이었다. 길가 밭엔 술 먹고 훈수 드는 패와 심는 패로 나뉘어 시끄러웠다. 여자들은 그놈의 입방정에 주눅 든 고추가 못 선다며 고추모를 붙잡고 킥킥댔다.
 
 
이러쿵저러쿵 어수선한 한나절이 지나가면 가을 고추를 따서 팔아 보태도 모자랄 만큼 밥값만 왕창 나갔다. 젊고 내성적이었던 나는 종일 입이 열댓 발 나와 있었다. 나이 들어 할 일이 없으면 낮잠이나 자든가. 저 시끄럽고 품위 없는 음담패설이란…. 내가 이사를 하면 조용한 외딴곳에서 조용하게 살 거라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십년의 나이를 더 먹고 이사 나온 이곳도 길갓집이다. 여기도 땅이 40여 미터나 길가에 붙어있다. 소나무 한그루가 집값보다 더 비싼 화려한 전원주택이 이웃에 있지만 내 집은 그냥 농가 주택이다. 100평 정도 되는 땅에 멋진 소나무나 정원수 대신 한쪽 귀퉁이엔 텃밭을, 한쪽은 과실수와 온갖 꽃을 심어 놓았다. 아이들이 열매도 따고 요리조리 뛰어놀면서 숨바꼭질하기 딱 좋다.
 
길을 사이에 두고 사는 집주인들은 담 밖으로 눈이 마주치면 서로 부른다. 꽃이 폈다고, 꽃이 졌다고, 쉬는 날이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별별 핑계로 찻길을 건너 마실을 다닌다. 오늘은 귀촌이 꿈인 도시 사는 동호회원이 방문했다. 나무들이 자라 온갖 야생화들과 어울리면 조만간 ‘타사의 정원’이 되겠다며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해주신다.
 
고추 하나 심는데도 어찌나 많은 관심이 쏠리는지. 예전에는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간섭과 잔소리가 관심과 사랑이란 걸 알았다. 사진은 전북 임실군 신평면 호암리 들녘에서 농민들이 고추 모종을 심는 모습. [중앙포토]

고추 하나 심는데도 어찌나 많은 관심이 쏠리는지. 예전에는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이제는 간섭과 잔소리가 관심과 사랑이란 걸 알았다. 사진은 전북 임실군 신평면 호암리 들녘에서 농민들이 고추 모종을 심는 모습. [중앙포토]

 
대화 소리에 부동산업을 하시는 이웃분이 지나가다 들어오셨다. “타샤는 무슨~ 지저분한 나무를 다 뽑고 전부 잔디를 까쇼~ 고급스럽게 가꿔 놓아야 집값도 올라가지요.” 지나가던 앞집 아저씨가 또 들어오신다. “뭔 말이여? 좋은 땅에 고추를 심어야 실속 있지. 마당엔 세멘을 하소. 고추 말리고 콩 말리고 추수해서 처리하는 데는 세멘 바닥이 최고야.”
 
이곳은 안동 시내에서 가깝지만 그래도 전형적인 농사짓는 동네다. 내가 사는 집인데 모두 제집처럼 자기 생각이 옳다고 옥신각신하시다가 웃음이 터지곤 한다. 마당에서 두더지나 뱀이라도 만나던가, 뜨거운 해를 머리에 이고 잡초를 뽑다 보면세멘바닥을 하는 게 맞다 싶고, 가끔 큰돈이 욕심나면 부동산 사장의 말이 생각난다.
 
나이가 드니 간섭과 잔소리가 관심과 사랑이란 것을 알았다. 나랑 전혀 다른 성격이나 생각을 이해하고 서로 나누다 보니 좋은 이웃사촌이 많이 생기고 그것이 소통의 힘이란 걸 느낀다.
 
신문을 펴면 온갖 사고가 마음을 어둡게 만든다. 아파트에 혼자 사는 여성이 이유도 없이 화를 당했단다. 사람과 사람이 더불어 살지 못하고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니 너무 살벌하다. 내가 시골 내려간 40대의 어느 해, 고추를 심으며 겪은 이상하던 삶의 모습이 60대가 되면서 그 어른 중에 내가 있다. 개가 짖는 걸 보니 또 누가 왔나 보다.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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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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