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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민주주의의 사망과 인류의 희망

중앙일보 2019.06.19 00:23 종합 31면 지면보기
박명림 연세대 교수·김대중도서관장

박명림 연세대 교수·김대중도서관장

인간공동체의 성격과 체제는 순환한다. 특히 국가공동체는 단선적 발전이 아니라 전진과 후퇴, 흥망과 성쇠, 답보와 횡보를 끝없이 반복한다. 세계(사)의 순환 또한 필연이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냉전의 해체로 인해 인류가 자유민주주의의 완전 승리와 역사종언을 언명한 지 한 세대 만에 오늘날 민주주의의 사망과 퇴조를 말하는 담론들이 확산되고 있다. 근래 세계적 주목을 받은 민주주의 관련 저작들의 제목과 내용은 충격적이다. 지난해 화제가 된 ‘이코노미스트’지의 세계 민주주의지형 분석 역시 같았다.
 
오늘의 언설들은 민주주의의 위기와 위축을 넘어 분명히 민주주의의 사망과 조락을 경고하고 있다. 심지어 ‘민주주의의 자살’ ‘민주적 자살’을 말하는 이론들도 제기되고 있다. 승리에서 우려로, 환희에서 우울로의 반전이다. 21세기 주요 이론가와 철학자들이 인류현실에 대한 깊은 관찰과 고뇌 끝에 내놓는 진단들이니 크게 틀리지는 않아 보인다.
 
주요 현상들만 보아도 현대민주주의의 퇴락 주장들이 허언이 아님을 알게 된다. 좌우 포퓰리즘의 확산, 현실·진짜(reality)와 쇼·가짜(show)의 혼재(reality show) 속의 후자 우위, 극우정당의 대거 진출과 득세, 제도·헌법·교육·시민에서 문화·인종·종교·민족 정체성과 담론으로의 이동, 부동산업자·코미디언·2세·선동가를 포함한 정치적 공적 훈련을 받지 않은 개인들의 집권, 법치·법치주의에서 인치·사인주의로의 전이, 진영 대치로 인한 문제 해결의 교착과 실패, 극단적인 사회경제적 빈부격차와 정치적 양극화·속물화…. 이러한 세계적 흐름에서 한국 역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일찍이 민주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타락하며 혼란과 조종(弔鐘)에 이르게 된다는 누천년 전의 통찰과 혜안들을 곱씹어 보게 되는 세계현실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사망과 해체 위기라는 진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민주주의의 수정 이외의 대안을 찾기 어렵다는 또 하나의 현실을 인정해야한다. 민주주의 문제는 반드시 민주적으로 해소되지 앉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민주정의 등장과 사망의 장구한 순환을 보며 이를 막으려 고투했던 노력의 산물인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결합, 즉 민주공화국 사유와 실천을 오늘에 되살려야 하는 명백한 이유다.
 
인류에게 처음으로 민주공화국을 제안한 선현들은 능력 있는 의회민주주의를 대안으로 제안한다. 의회는 곧 대의·대표·공화라는 의미다. 임마누엘 칸트는 국가형식·지배형태보다 통치방식과 양식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놀라운 통찰이다. 즉 대표·공화·대의의 방식을 갖추지 않은 것은 비록 민주국가(형태)일지라도 독재·독식·독임을 추구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구(不具)인 것이다.
 
저녁 늦게 의회를 나서던 처칠은 뒤를 돌아보며 동료에게 말한다. “이곳을 보세요. 이 아담한 장소가 바로 우리와 독일의 차이입니다. 이곳 덕분에 우리는 그럭저럭 성공으로 향하는 길을 걷지만, 이곳이 없는 독일은 효율성이 탁월한데도 결국 재앙을 맞는 거지요.” 이 말이 나치등장 훨씬 전이라는 점은 놀랍다. 같은 때에, 필자가 이미 강조했던, 당대 최고 학자 독일의 막스 베버가 했던 말을 한 번 더 상기하자. “국가 미래질서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질문은 ‘어떻게 하면 의회로 하여금 통치를 담당할 능력을 갖게 만드는가’에 놓여야 한다. 다른 모든 질문은 단지 오류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부차적이다.”
 
역사적으로 의회 대신 국민을 앞세운 ‘국민민주주의’는 민주주의와 독재 사이에서 거의 항상 후자로 접근·변질하여 왔다. 지지국민에 기반한 소수의 대표들도 설득하지 못하면서, 그 소수 대표들을 지지하는 더 많은 국민들을 설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고대 이래의 독재들이 ‘원로원·평민원·의회·국회’ 대신 ‘국민! 인민!’을 외친 통치방식의 산물인 이유였다.
 
민주공화국에서 국민은 주권(sovereignty)을 가지지만 권한(authority)을 갖지는 못한다. 권한은 국민의 대표가 행사한다. 대한민국 헌법을 포함해 민주공화국이 입법권·집행권·사법권을 의회·행정부·법원에게 부여하는 이유다. 즉 근본원리에 비추어 볼 때 민주공화국에서는 의회가 곧 국민이다. 반면 독재와 전체주의에서는 독재자·지도자가 곧 국민이다.
 
인류는 지금까지 크게 보아 민주공화국의 근간인 의회민주주의의 두 대표유형, 즉 ‘웨스트민스터 모델’과 ‘매디슨 모델’ 사이의 다양한 변이와 응용을 선택하여 왔다. 물론 둘을 결합·확장·변용한 여러 형태들도 시도되어 왔다. 그 중 전후 ‘스칸디나비아 모델’은 뚜렷하게 성공한 경로였다. 유능한 의회민주주의를 통한 인간문제와 사회경제문제의 해소 경로를 말한다.
 
지금 인류는 이조차 넘어서야 할, 또는 돌아가야 할 ‘오래된 새 길’과 ‘고전적 혁신모델’을 찾아나서야 할 시점이다. 기로에 선 세계와 한국의 민주주의 운명 앞에서 아시아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던 한국이 보편민주주의 모델에서도 앞서길 소망한다. 지금은 비관적이지만 미래의 희망마저 포기하지는 말자.
 
박명림 연세대 교수·김대중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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