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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웃들, 나를 마음껏 이용하세요

중앙일보 2019.06.18 00:05 종합 23면 지면보기
주인공 순수 청년 라짜로. 성경 속 인물 ‘나사로’에서 이름을 따왔다. [사진 슈아픽처스]

주인공 순수 청년 라짜로. 성경 속 인물 ‘나사로’에서 이름을 따왔다. [사진 슈아픽처스]

외부와 단절된 시골 마을에서 한 후작부인이 소작제도가 폐지됐다는 사실을 감춘 채 가난한 소작농들을 노예처럼 부린다. 아이들은 학교조차 가지 못하고, 어른들은 죽도록 일하고도 빚만 떠안는다. 1980년대 신문기사로 뒤늦게 세상에 알려진 이탈리아의 실화다.
 

‘행복한 라짜로’의 독특한 시간여행
실화 바탕으로 매혹적 상상력 더해

20일 개봉하는 ‘행복한 라짜로’(감독 알리체 로르와커)는 여기에 매혹적인 상상을 보탠 영화다. 주인공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는 순박한 고아 청년. 후작부인에게 혹사당하는 것도 모자라 다른 소작농들에게 놀림 받으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던 그는 모두 떠나버린 마을에 홀로 남겨진다. 수년 후 도시의 빈민이 된 소작농들 앞에 조금도 늙지 않은 라짜로가 나타난다.
 
이 독특한 시간여행기는 종교적이고 씁쓸한 우화 같기도 하다. 라짜로는 성경에서 부활과 믿음을 상징하는 인물 나사로에서 따온 이름. 봉건시대의 착취를 간신히 벗어나고도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여전히 밑바닥 신세인 이웃들에게 그는 계시처럼 나타나 기꺼이 이용당한다. 후작 부인의 괴짜 아들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와도 신분을 초월한 우정을 나눈다.
 
CG(컴퓨터그래픽) 없이 빚어낸 ‘마술적 리얼리즘’의 순간들도 흥미롭다. 한 예가 “음악이 떠나는” 장면. 그저 음악이 듣고 싶었던 가난한 친구들을 성당에서 문전박대하자, 라짜로는 성당의 모든 음악을 보이지 않는 구름처럼 뭉쳐 친구들을 뒤쫓게 한다.
 
이런 장면에 설득력을 더하는 건 1000대 1의 경쟁을 뚫고 주연에 발탁된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선한 얼굴. 연기가 처음인 게 놀라울 만큼 그는 천연기념물급 순수 청년 라짜로 그 자체가 되어 영화 속에 살아 숨 쉰다. 후작부인 역은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감독 로베르토 베니니)의 주연배우 니콜레타 브라시가 맡았다.
 
올해 서른여덟 살인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칸영화제에서 5년 전 ‘더 원더스’로 심사위원대상을, 이 영화로 지난해 각본상을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다보면 ‘행복한 라짜로들’을 만나곤 한다”면서 “그들은 어디에 있건 뒤로 물러나며 타인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리를 내준다”고 연출의 변을 이렇게 이었다. “오늘날 성자가 현대의 삶 속에 나타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어쩌면 별생각 없이 그를 내칠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삶에서 숭고함을 발견하는 점에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전통도 번득인다.
 
빈부격차를 다룬 시선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과도 겹쳐진다. 로르와커 감독은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 중 한 사람.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에 ‘기생충’이 호명되는 순간 기뻐하며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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